아무래도 이 글은 경어체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명색 4대 봉사(封祀)를 하는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명절 차례를 지낼 때면 좁은 대청에 다 오르지 못한 가족들은 마루 아래에 자리를 펴고 배(拜)를 올리는데 저는 언제나 마루 위였습니다. 서열에 따라 혼자 잔을 올리고 절하는 순서도 있었지요.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하고 가슴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손해(?)도 컸습니다. 또래의 다른 아이는 집안 차례가 끝나면 외가나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았지만 저는 할아버지를 필두로 한 일가 어른들을 따라 다른 종가의 차례에 참여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언제나 오후 서너 시나 돼야 끝나니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해가 저물어 더는 세배를 다닐 수 없었지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전날 밤 늦게 복조리를 대문 안에 던져놓고, 첫 새벽에 문을 두드려 세뱃돈 대신 복조리 값을 받아 벌충했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에 사내가 문을 두드리면 복이 들어온다는 속설 덕분이었죠. 여자, 심지어는 안경 쓴 사람이 첫 손님이 되어도 복이 나간다는 요즘 기준으로는 턱도 없는 속설이지만요.
기제사 지내는 날의 추억도 괜찮습니다. 그때는 어느 집안이나 자정 무렵 제사를 지냈는데 시간을 기다리다가 잠에 곯아떨어져도 장손인 저는 꼭 깨워 참여시키고 잔을 올리게 했습니다. 끝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나물 얹은 비빔밥에 산적 고기 몇 점과 돔배기라는 이름의 상어고기를 곁들이는 그 맛은…. 통행금지가 있는 때였지만 인근에서 온 가족들은 태연히 돌아갔고, 나중에 알았지만 귀갓길에 경찰이나 방범대원을 만나면 어느 집 제사에 다녀오는 길이라 말하면 손바닥에 스탬프를 찍어 통행증을 대신하게 했다더군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장손노릇과 멀어졌습니다. 설날이야 대개 방학 중이니 차례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추석이나 기제사는 엄두를 못 냈죠.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하필 형사였습니다. 설과 추석은 당연히 비상경계였고, 당직 상황실장은 꼭 연휴기간 중 한두 번 새벽에 비상소집을 발령합니다. 별일도 없는데, 제 시간에 응소하지 않으면 시말서감이니 눈치껏 다녀올 수도 없게 하려는 것이죠. 얼마나 놀부 같아 보이던지!
고향에서 저를 대신하는 동생들이나 어머니에게 영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직이거나 수사본부가 차려져 있지 않은 제사 때는 눈치껏 땡땡이를 쳐 고향까지 차를 달렸죠. 석회(夕會)가 끝나면 이미 오후 7시가 넘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 보면 밤 10시가 넘어 출발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겨울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고속도로도 없는 200㎞쯤 되는 길을 시간에 맞추려면 틈만 보이면 과속이었죠(공소시효는 이미 끝났습니다). 더군다나 눈이 내리지 않아도 군데군데 함정 같은 빙판길이었으니 파트너였던 선배는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핀잔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사 지내러 가는 길은 마음 푸근했고 한 번의 사고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외국생활을 하게 되자… 말해 뭣하겠습니까. 한참을 그렇게 도리를 못하다가 제사를 절에 모셨습니다. 그러다가 귀국해서 보니 명절의 합동차례는 조상님께 너무 죄스러워 집에서 직접 지내고 기제사만 법회로 대신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졌더군요.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기도 했지만 자식이나 형제도 저마다 바쁘니 전날 저녁이나 당일 새벽에 왔다가 차례만 지내면 음복 잔조차 비우지 못하고 허겁지겁 올라가기 바쁘더군요. 절에서 지내는 기일법회도 혼자이기 일쑤였고요.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어머니를 보내며 일을 저질렀습니다. 참, 제 위로 막내 삼촌분이 계십니다. 어른이시니 조심스럽게 뜻을 밝혔더니 말씀하시더군요. “장손이 나이 들어 그리하겠다면 나야 따라야지.” 죄송했지만 고마웠습니다.
장례기간 중 먼저 가신 4대 일곱 분 산소를 모두 파묘해 어머니 유해와 함께 화장해 선산에 뿌렸습니다.
동생 중 하나가 납골당을 말하더군요. 까놓고 말했습니다. 납골당이라는 곳이 연중 싸늘한 대리석 냉기뿐인데 거기에 이미 가루가 된 유해를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얼마나 찾게 될 것 같으냐고 말입니다. 수긍하더군요. 어머니 49제를 지내는 날, 여덟 분 모두의 천도재를 지내고 차례와 제사마저 접는다고 선포했습니다. 나오려는데 너무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스님에게 여쭈었더니 기일법회를 지내지 않더라도 위패는 모실 수 있다더군요. 위패 안치를 부탁하고, 생각나고 그리우면 각자 찾아 절이라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고백합니다. 솔직히 어머니 장례를 기다렸습니다. 함부로 산소에 손을 대면 있을지 모른다는 동티가 찜찜해서였죠. 그럼에도 작심한 것은 아름다운 전통이기는 하지만 차례와 제사로 인한 갈등이 가장 큰 까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전 부치기의 힘듦, 손님맞이의 고통 운운하는 세태와 때만 되면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을 방정이라 탓했는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식이라야 한둘이 대부분이고, 외국 근무도 흔한 세상인데 그대로 두었다가는 결국 엉망이 되는 것은 불 보듯 환한 노릇이더군요. 벌초는 또 어떤가요.
아들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자식으로, 아들로, 장손으로, 결혼의 한 짐은 덜어준 것이니 슬슬 생각해보라고 말입니다. 멀뚱히 저를 보다가 위패 모신 절에 가면 스님에게 말씀을 드려야 하느냐고 묻더군요. 생각나면 슬그머니 법당에 가서 위패나 한 번 찾아보고 절 몇 번 올리면 된다고 했죠. 그런데 정말 찾아갈까요.
‘서양 귀신은 제삿밥 안 먹는데 우리 귀신만 먹겠느냐’가 요즘 제 뻔뻔한 변명입니다. 혹시 저승에서 조상님들이 배고프다고 펄펄 뛰시면 무릎 꿇고 벌 받을 생각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차례를 접은 첫 설날입니다. 뭘 할까 궁리 중인데 위패 모신 절은 번잡할 것 같아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하는 게 가장 유력합니다. 아들이 결혼해 새 후손이 생기면 그때는 궁리할 것도 없겠죠, 그놈 하자는 대로하면 모두가 더 없을 테니까요. 참 불효입니다만, 벌써 잊은 듯 하렵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