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는 피카소, 달리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난한 무명시절이 있었다. 1920년대 고향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에서 생활했던 미로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물감을 살 돈은커녕 끼니를 해결할 돈마저 없을 만큼 가난했던 미로는 어느 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드러누워 환영을 보게 된다. 몸은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어느새 손은 붓을 쥐고 그가 본 장면을 화폭에 옮기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어릿광대의 사육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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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안 미로, 어릿광대의 사육제(1924~25). |
그림은 흐느적거리는 동물과 사람, 물건, 기호,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원근법을 무시한 채 그려진 형상들은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화면 왼쪽 가운데엔 어릿광대가 등장한다. 기타처럼 생긴 몸은 다이아몬드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희극 속에 등장하는 다이아몬드 문양의 옷을 입은 어릿광대 할리퀸을 연상시킨다. 긴 콧수염이 달린 동그란 얼굴의 반은 밝은 하늘색이고 나머지 반은 검붉은 색이다. 마치 조금 덜 힘든 낮의 모습과 더 힘든 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고 머리에 꽂힌 긴 바늘 사이로 뱀이 스멀스멀 기어나가고 있어 마치 창작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오른손에 든 붓은 성냥불처럼 타오르는가 싶더니 용을 닮은 환상의 동물로 변신했다. 왼손은 앞에 놓인 주사위 쪽으로 뻗으려 하고, 주사위에서 튀어나온 날개 달린 생명체는 공을 튕기고 있다. 배에 난 구멍 때문인지 어릿광대의 얼굴은 유독 더 슬퍼 보인다. 어쩌면 미로는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광대에 빗대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사육제는 사순절 단식이 시작되기 전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벌이는 축제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광대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다들 노래하거나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등 축제를 만끽하는 분위기다. 오른쪽 위 창문에는 이글거리며 타는 태양이 떠 있고 그 옆의 검은 삼각형은 파리의 명물 에펠탑을 상징한다. 화면 왼쪽의 사다리는 상승과 탈출, 높은 지위의 상징으로 성공하고 싶은 화가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오른쪽 테이블 위에 화살로 관통된 초록색 지구본 역시 세계 정복에 대한 작가의 욕망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미로는 죽을 만큼 힘든 오늘의 현실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성공을 향한 자신의 포부와 희망을 상상력을 총동원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완성된 그해에 제1회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출품돼 후안 미로의 이름을 파리 화단에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미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최고의 걸작을 그려냈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양식을 만들어 내 20세기 미술사를 빛낸 추상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