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악의 해를 만날 때가 있다. 화가 폴 고갱에겐 1897년이 딱 그런 해였다. 원시의 이상향을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까지 왔지만 인생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수중에 돈은 다 떨어졌고, 건강도 최악인데다 더 이상 새로운 작품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 알린의 사망 소식까지 들었다.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고갱은 자살을 결심한 후 생의 마지막 작품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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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년). |
가로 4m 가까이 되는 이 거대한 그림은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성됐다. 그림은 타히티섬을 배경으로 인생을 비유한 다양한 상징으로 채워져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내러티브 구조를 취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세 명의 여성 옆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가 보인다. 이는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화면 가운데 서 있는 남자는 과일을 따고 있다. 선악과를 딴 이브를 연상시키는 이 남자는 타락과 죄를 상징한다. 뒤쪽엔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고, 그 앞 소녀는 이들을 보며 놀란 듯 한 손을 위로 치켜 올렸다. 거의 나체로 생활하는 원주민 여성들과 달리 서구의 긴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은 순수한 섬까지 덮쳐온 문명화의 침입을 상징한다.
과일 따는 남자 왼쪽에는 하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과일을 먹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서구식 옷을 입은 이 아이도 이미 문명화의 단맛을 알아버린 듯하다. 왼쪽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웅크린 늙은 여인이 등장한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문명화인지 죽음인지는 알 수 없다. 위로하려는 듯 노파 쪽으로 자세를 기울인 여성은 ‘바이루마티’다. 폴리네시아 전설 속 여신으로 타이티섬의 어머니라 불린다. 노파 왼쪽 하얀 새는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
그야말로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인생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고갱은 이 그림에 자신이 살면서 깨달은 생각과 교훈을 다 담아내려 했다. 훗날 친구에게 쓴 편지에도 “복음서에 비견될 만한 주제의 철학적인 작품을 끝냈다”고 썼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을 그림 왼쪽 상단에 써놓았는데, 이게 작품 제목이 됐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오히려 그는 인생 역작을 탄생시켰다. 그림을 완성한 고갱은 산으로 가 비소를 삼켰다. 하지만 과다 섭취로 다 토하는 바람에 자살은 실패했다. 삶도 죽음도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는 인생 마지막까지 창작 혼을 불태우다 1903년 조용히 숨을 거뒀다. 120년여 전 그림이 지금도 울림을 주는 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림 제목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