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아이가 정원에서 종이 등불을 켜고 있다. 주변에는 하얀 백합과 분홍 장미, 노란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했고, 등불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빛은 아이들 얼굴과 옷으로 번진다. 같은 옷을 입은 두 아이는 등불 밝히기에 집중한다. 존 싱어 사전트가 그린 이 그림은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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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86년 |
미국인이지만 파리에서 활동했던 사전트는 1884년 살롱전에서 물의를 일으킨 후 이듬해 도주하다시피 영국으로 떠나왔다. 그림 속 배경은 영국 코츠월즈의 한 농가 주택 정원으로 당시 사전트는 동료 화가인 프란시스 밀레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모델은 삽화가 프레드릭 버나드의 두 딸로, 왼쪽은 열한 살 돌리, 오른쪽은 일곱 살 폴리다. 원래는 밀레의 다섯 살 난 딸을 그리려 했지만 너무 어린 데다 어두운 모발색 때문에 금발을 가진 이 아이들로 교체됐다.
그림의 모티프는 런던 템스강변에서 봤던 매력적인 등불에서 얻었다. 사전트는 정원에서 소녀들을 직접 관찰하며 그렸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인물이나 풍경이 아니라 황혼의 빛과 등불의 빛이 만나 빚어내는 복합적인 빛의 효과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해 질 녘 빛을 포착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돼 있기에 실제 작업 가능한 시간은 하루 10분이 채 되지 못했다. 매번 모든 그림 도구를 미리 준비하고, 도중에 져버린 꽃은 인조 꽃으로 대체하는 등 불편과 어려움도 많았다.
1885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매일 작업했음에도 그림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결국 두 번의 여름을 난 후에야 완성됐는데, 그 과정은 정말 더디고 힘든 여정이었다. 하루는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는지 사전트는 작품 제목을 ‘제기랄! 어리석군, 어리석어. 바보 같은 모습 Darnation, Silly, Silly, Pose’로 붙일 뻔했다. 대중가요 가사에서 따온 원제목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Carnation, Lily, Lily, Rose’를 친구가 말장난으로 바꾼 것이었다. 과정은 느리고 고됐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887년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 출품된 그림은 큰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 영국 국립미술관인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됐다. 이후 그는 초상화가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성을 누렸다.
문득 궁금해진다. 화가가 그리 힘들었다면 모델을 섰던 아이들은 어땠을까? 자매는 두 해 여름 내내 매일 저녁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등불을 밝히며 포즈를 취해야 했다. 동생은 겨우 7세였는데 말이다. 아무리 재밌는 등불놀이도 매일 반복되면 더는 놀이가 아니고 노동이자 고역이었을 것이다. 자매는 무던히도 참고 견뎠을 터다. 어쩌면 이 아름다운 장면이 두 아이에겐 고통의 기억일지 모른다. 화가보다 어린 모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