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임 대학총장이 점퍼를 입고 근무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원피스를 입고 등원한 정의당 류호정 국회의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근엄한 학위복이나 양복 대신 활동성·수평적 접근성을 상징하는 점퍼 입은 총장을 보면서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탈권위적 진정성을 느꼈다. 그런데 원피스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품위 논쟁’이 뒤따랐다. 진정 품위가 없는 것은 정책기사보다는 사소한 것을 선정적으로 이슈화시켜 논쟁을 유발시킨 언론이 아닐까. 류 의원이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을 때 일부 극우 성향 인터넷 공간에선 류 의원을 조롱하는 목소리가 컸다. “국회의원 복장으로 부적절하다”는 비난 뒤에는 여성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종의 ‘혐오’가 도사리는 듯 했다. 심지어 치마 길이까지 품평하는 저열한 발언이 쏟아졌다.
‘의회에서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상징을 세뇌시키고 총장은 취임식·입학식에서 서구식 학위 복식(服飾)을 획일적으로 입도록 강요한 감시자는 누구일까. 조선시대까지 의복은 정치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차별적 복식’의 의미가 강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의복의 권력적인 성격은 변형되어 은밀히 신체와 정신에 스며드는 미시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수의 감시자가 죄수들을 시선(권력)의 비대칭성을 통해 감시하는 벤담의 파놉티콘(감시자는 죄수들을 다 볼 수 있으나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다. 죄수는 항상 누군가 지켜본다고 여겨 스스로 자신을 통제토록 하는 규율 권력이 발생한다)을 승계한 푸코는 규율권력(자기검열)이 사회 전반에 작용한다는 ‘파놉티시즘’으로 의미를 확대했다.
이런 파놉티시즘은 의복에도 나타난다. 피감시자에게 의복은 규율권력으로 작용해 순종화되고 스스로 자기통제하는 기제가 된다. 일제시대부터 학생들의 교복이나 노동자들의 유니폼은 파놉티시즙의 다른 표현이었다. 교육당국은 교복을 통해 규격화된 단정함을 강요해 왔고, 그것은 신체는 물론 정신마저 스스로 통제하게 하는 의복 파시즘으로 작용하였다.
문제는 그런 규율권력은 권력의 대칭성이 발생하는 수평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국회의원 복식논란이 한 예이다. 의원이 차별적 복식을 하면 큰일이 난 것처럼 던진 상징메시지에 대중들과 일부 의원이 호응하여 논쟁이 됐다. 국회의원이 정장을 하든, 캐주얼복을 입든, 다양성을 본질로 하는 의회에서 왜 문제가 되는가. 의원의 의복이란 입법활동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반드시 획일화된 정장이어야 하는가. 의원에게 특정의복을 ‘관행’이란 이름으로 강요하고, 이에 어긋나면 빅브라더처럼 전통적 젠더 이념과 왜곡된 상징을 각인시켜 동료와 대중을 규율권력화시키는 감시자는 누구일까.
군대 등 강제적 조직을 제외한 자율 조직에서 특정 의복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상징폭력이다. 다양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민주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다. 의복의 민주화도 민주주의의 한 내용이다. 정치인은 발언과 입법을 통해서만 정치 의사를 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의복을 통해서도 메시지를 표출할 수 있다.
의원에 대한 평가는 의정활동에 대해 해야 한다. 다만 ‘의복 논란을 통해 인지도만 올린다’는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콘텐츠가 따라야 진정성을 가진다. 의복이 던진 메시지가 검정 같은 어두운색 정장과 넥타이로 상징되는 엘리트 집단의 관행을 깨는 어젠다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직까지 ‘원피스 의원’과 ‘점퍼 총장’이 확산되기에는 사회적 동력이 부족한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아직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고 본질보다는 이미지로 상대를 평가하는 감성문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정치·교육과 언론의 문제점이 깊이 꽈리를 틀고 있다.
동서대 경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