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있다. 39세 잡지 기자 장하리(장나라 분)를 통해 여성들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불안을 그린 ‘오 마이 베이비’다. 미혼녀가 결혼 대신 정자 기증을 받아 출산을 계획하는 내용이 독특했다.
그런데 얼마 전 ‘돌직구’ 화법과 ‘4차원’ 매력으로 인기를 끈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 씨가 자발적 미혼모가 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미혼녀의 정자 기증 출산이 더는 드라마 속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한 정자은행에서 보관돼 있던 이름 모를 한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자연임신이 어렵고 당장 시험관을 하더라도 성공확률이 낮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이런 선택을 했단다. 무엇보다 아이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유리 씨에게 많은 여성들이 박수를 보냈다.
3040세대 미혼 직장여성 중 많은 이들이 출산에 대한 걱정을 한다.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출산이 어려워질까 봐 난자 냉동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출산을 ‘여성의 숙제’로 떠넘기기도 한다.
사유리 씨의 선택을 보면서 출산이 ‘아이를 낳을 권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평소 4차원 캐릭터로 치부됐던 그는 참 소신있는 여성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그가 일본에서 출산한 이유를 놓고도 시끄러웠다.
한국에서 현행법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다수라 정자 기증을 통해 배우자가 없는 ‘비혼 출산’은 어렵다. 이에 대해 논란이 일면서 정치권은 “법·제도 개선 논의를 하겠다”고 밝혔다. 대한산부인과학회에서도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의 시술 대상 확대에 나섰다. 결국 대상자의 범위를 법률혼 부부에서 사실혼 관계를 포함하는 ‘부부’로 확대하는 데 그쳐, 여전히 비혼 여성은 배제됐다. 이필량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은 “우리 사회는 외국과 문화적·윤리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해외에서 (비혼여성의 출산이) 가능하다고 해서 우리나라도 가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현재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등 17개국, 그리고 영국은 독신 여성 또는 동성 여성 커플에게 인공생식을 통한 출산을 허용하고 있다. 이 이사장의 말처럼 정자 기증을 통해 비혼 출산이 용이해지면 이런 보조생식술로 태어난 동성 커플의 자녀는 어떻게 볼 것인지 윤리적 논란이 될 수 있다. 비혼 출산에 부정적인 이들은 엄마의 이기심을 탓하며 아이에게 아빠를 뺏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논란을 차치하고도 사유리 씨의 선택은 비혼 동거와 출산 등 대안적 가족 형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다’에 동의하는 청년 여성 비율은 2008년 52.9%에서 2018년 72.2%로 높아졌다. 비혼 출산에 동의한다는 응답 비율도 같은 기간 26.2%에서 36.3%로 올랐다.
청년들의 변화된 현실 인식에 맞게 정부의 출산 지원책도 바뀌어야 한다. 신혼부부 주거 지원이나 출산·보육료 지원도 중요하지만 20대·30대 청년들이 왜 결혼하지 않으려 하는지, 아이를 갖지 않으려 하는지 등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신혼부부 및 다자녀 가정에 부동산·세제 혜택을 주었다. 여기에서 벗어난 한부모 가족, 다문화 가족 등에 대해서는 별도로 지원하는 정도였다. 정부는 아이가 어떤 가족 상황에서 자라더라도 차별받지 않고 기본적인 양육비용을 국가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사유리 씨의 비혼 출산으로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인 낙태죄도 이슈가 되고 있다. 낙태죄 관련 형법 개정안은 지난 24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는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가 모든 낙태를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임신 14주까지 낙태가 전면 허용되고 24주까지는 조건부로 허용하는 것이다.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폐지에 찬성하는 여성계와 반대하는 종교계의 입장을 의식한 결론이다. 하지만 여성계는 정부안이 낙태죄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처벌 기준을 만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제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놓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적 자유의 권리, 건강권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법 처리 시한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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