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충남 당진에서 키조개 조업 현장을 취재했다. 키조개는 잠수부가 바다 밑을 걸어 다니며 갈고리처럼 생긴 도구로 찍어서 캔다. 이런 조업방식을 잠수기어업이라고 한다. 조업 현장에 배가 도착하자 잠수부는 허리와 등에 총 37㎏에 달하는 납덩어리를 달고 오로지 공기호스 하나에만 의지한 채 바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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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세계 최초로 개발된 일회용 커피믹스. |
세 시간 동안 바다 밑에서 키조개 2000개를 채취한 잠수부는 배 위로 올라오자마자 가스버너에 물을 끓였다. 몸이 얼마나 얼었으면 저럴까. 측은한 느낌이 들던 찰나, “추운 날씨 배 위에서 고생했는데 커피 한잔하겠냐”는 뜻밖의 말을 건넸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고생한 양반이 배 위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던 취재팀을 오히려 챙겼다. 그래도 커피 한잔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잠수부는 능숙하고 신속한 솜씨로 커피를 탔다. 1989년 출시된 이래 30년 넘게 조제커피(커피믹스) 시장에서 부동의 판매 1위를 지키고 있는 ‘맥심모카골드’였다. 그 어떤 고급 커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잔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을 짓는 한 남자의 모습을.
비단 잠수부에게만 그런 게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무화과를 따던 전남 영암의 농부에게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미역을 채취하던 부산 기장의 어부에게도,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온 냉이를 캐던 충남 홍성의 농부에게도 커피믹스는 유일하고 경이로운 노동음료였다. 심지어 농어촌뿐만 아니다. 공사현장 임시 사무실로 쓰이는 컨테이너 안에 커피믹스를 쌓아두지 않으면 폭동 분위기가 연출될 정도이며,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커피믹스를 제공하지 않는 기사식당은 순식간에 단골 기사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질 정도라고 한다. 믹스커피를 마시며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의 풍미와 산미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믹스커피는 커피와는 전혀 다른 맛이며 그만의 역할이 있을 따름이다. 특히나 노동현장에서는 그 역할이 더욱 도드라진다. 종이컵에 든 한잔의 믹스커피는 밥벌이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수이자 유일한 여유였다.
커피와 설탕 그리고 식물성 크리머를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한 ‘커피믹스’는 1976년 동서식품에서 처음으로 출시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다. 포장지를 뜯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커피믹스의 편의성과 신속함은 산업화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시간이 곧 돈이고 ‘빨리빨리’가 최고의 미덕이던 시절에 커피믹스는 최고의 보급품이었다. 심지어 적절한 카페인과 당 그리고 지방까지 보충해주니 노동자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흔히들 우리나라 음식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할 때 ‘임금님 진상품’ 혹은 ‘수라상에 올랐던’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조선 임금의 밥상보다는 오늘날 이 땅의 노동자의 음식이 훨씬 가치 있다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는데 이만큼 기여한 음식도 없다. 따라서 믹스커피야 말로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중요한 유산이며, 현대 한국인이 창조한 전통음료라고 생각한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