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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기록이 이렇게 소중한 겁니다 /이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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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1-03-17 19: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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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사림파의 영수였던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 여름 관아를 나와 남쪽으로 길을 나섰다. 그는 8월 14일 휴천면 운서리 적조암에서 산길에 접어들어 이후 4박 5일 동안 지리산을 유람했다. 적조암을 거쳐 고열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중봉을 거쳐서 해 질 녘 천왕봉에 올랐던 점필재는 넷째 날 천왕봉을 한 번 더 오른 뒤 주 능선을 따라가다가 백무동으로 하산했다.

점필재는 ‘평소의 소원’이던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 뒤 닷새간의 여정을 글로 남겼으니 바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이다. 그가 그 옛날 여름에 걸었던 산길은 각종 문헌상 지리산 제1호로 기록된 역사적인 탐방로다. 1489년에는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스승의 글을 본떠 ‘속두류록’을 남겼고 1661년 선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도 천왕봉 산행 기록을 남겼다. 이렇듯 여러 사람이 지리산 일대를 유람하거나 천왕봉을 올랐지만 그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가 점필재였으니 지리산의 ‘공식적인’ 첫 산길이라는 의미는 각별하다.

빠르면 올 연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묵고 또 묵어 흔적조차 희미해진 점필재의 산행길이 다시 열린다. 경남 함양군이 추진하는 ‘유두류록 탐방로’는 지난해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의 심사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현재 진행 중인 타당성 조사가 끝나면 오는 6월께 탐방로 개설을 결정하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전문 산악인들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 능선을 종주하는 데 일주일 정도가 소요됐다. 그런데 500여 년 전 점필재가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 5일이 걸렸다는 건 당시 이미 산길이 웬만큼 다듬어져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지리산을 찾을 때 마흔두 살이던 점필재는, 유두류록에 ‘날로 몸이 허약해지고 다리 힘도 쇠약해졌다’고 적었지만 너끈하게 가파른 길을 오르내렸다.

이번에 개설될 탐방로는 출발은 그의 발길을 따르지만 정상인 천왕봉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도중에 벗어나 벽송사로 내려간다. 오롯이 그의 경로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일대의 생태적 중요성을 고려해 백번 양보할 수 있는 일이다. 노장대에서 어름터를 거쳐 벽송사까지 이어지는 산길이 새로 열리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유두류록을 따라가는 길의 재탄생을 보면서 새삼 글과 기록이 지닌 힘을 깨닫는다. 5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선조가 남긴 글이 오늘날 지역을 알리는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되고 나아가 지역 관광과 문화를 살찌우는 풍성한 콘텐츠가 된 것이다. 산행기는 자체로 문학성과 기록성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 후대에 변화를 이끄는 값진 유산이 되기도 한다.

우리 선인들의 예뿐만 아니라 글과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30년대 히말라야 등반 개척기에 활동한 영국의 등반가 프랭크 스마이드는 선구적인 등반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등산과 관련한 27편의 다양한 책과 사진집으로도 유명하다.

1937년 그는 넉 달간 인도의 중앙 가르왈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분다르계곡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식물을 탐사하며 보낸 뒤 ‘꽃의 계곡’을 펴냈다. 분다르계곡은 그의 책에 힘입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그 아름다움과 생태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후일 그 이름을 따서 ‘꽃의 계곡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한 산악인의 기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사람들에게 선사해준 덕분이다.

그냥 걸어도 아름다운 길이지만 이처럼 앞선 이의 기록을 따라 걷는 길의 느낌은 남다르다. 후대의 사람들이 점필재가 지리산에서의 첫날 밤을 보낸 고열암에서 본 것처럼 ‘달빛이 여러 봉우리를 삼킬 듯 뱉을 듯하고, 운무가 용솟음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원로 산악인 김영도 선생이 후배 산악인들에게 한 고언이 떠오른다. ‘산에 대한 고민과 기록이 없다면 등산은 노동일 뿐이다. 단순히 오르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랑과 산행 후의 기록이 더해져야 한다’. 유두류록 탐방로 개설 소식을 듣고 글과 책과 기록이 넘쳐나는 시대에 기록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부국장 겸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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