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 이삿짐을 푼 지 얼마 안 되는 친구가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왔다. 일본어를 가르치는 파트타임 강사가 됐다는 것이다. 요즘 한·중·일 문화에 관심이 많지만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제약으로 비교적 안전한 아시아권 나라에 머물며 어학 수업을 받는 서양인이 늘어나고 있다 한다. 일본어 실력이 출중한 친구는 이 ‘코로나 특수’에 딱 맞는 인재로 갑작스레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친구는 어학원의 강의 자료, 스케줄을 익히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괴로움을 하소연하기 위해 친구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외국인 노동자 분투기’를 종종 남겼다. 친구의 사연은 날이 갈수록 다채로웠는데 다른 강사의 수업을 참관하고 온 날, 이런 문장을 남겼다. “수업참가자 레벨 차이가 크다. 잭슨상은 실력이 월등하지만 옆자리 찰스상은 입문자.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는데 찰스상이 압박감을 못견디고 수업 중에 울며 뛰쳐 나가는 걸 봤어.”

이 분투기는 대망의 수업 첫날, 정점을 찍었다. 친구는 파트 타임 강사지만 첫날만큼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어학원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이날, 공교롭게도 친구의 12살 아들 이민준(가명) 어린이의 방학이 시작됐다. 이 어린이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혼자 있어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댁이 같은 아파트에 있었고 친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친해진 이웃마저 캠핑을 떠났다. 친구의 분투기에 이민준 어린이의 ‘나 홀로 집에’가 부록으로 달렸다.

알래스카 미네소타 스위스 독일 등 전 세계 사람과 소통하며 수업을 한 친구는 자가격리하는 수강생을 위한 화상수업까지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부리나케 찾아간 집. 엄마를 본 이민준 어린이는 오열했고, 친구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장장 5분동안 눈물을 흘렸다. 하필 외국에서, 하필 엄마의 직장 생활 첫날, 하필 방학 시작에, 하필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종일 쏟아졌기 때문이다. 너무 무서우면 엄마한테 전화하지 그랬느냐는 친구에게 이민준 어린이가 말했다. “엄마 수업 ‘망할까봐’ 못했어.” 방해될까봐가 아닌, 망칠까봐도 아닌, 망할까봐. 귀엽고 웃기는데 어린이 말에 담긴 마음이 짠해서 한동안 채팅방에는 ‘ㅜㅜ’ 눈물만 타이핑됐다.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는 그 순간, 이민준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어린이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처음 마주한 공포와 맞선 이민준 어린이는 우리보다 큰 어른처럼 보였다.

책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사계절)’을 읽고 있다. 좋은 책은 아껴서 조금씩 읽게 되는데 이 책이 그렇다.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린이가 이런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41쪽).’ 이 부분을 읽다가 내게 좋은 대접을 해주던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한때 나는 초등학생에게 ‘독서교실 선생님, 글쓰기 쌤’으로 불렸다. 학원과 방과후학교에서 강사를 하던 그 시기, 어린이들은 날 환대했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했다. 그들은 아직 아이라서 신발 끈이나 머리끈을 대신 묶어달라 했다. 누군가의 끈을 묶느라 내 손이 바쁘면, 다른 이들은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거나 내 몸에 기댔는데 그마저도 못하면 내 옷깃을 잡았다. 아기같았다. 그래놓고 헤어질 시간이 되면 악수하거나 꼭 끌어안으며 다음 시간까지 나의 안녕을 기원해줬다. 어른같았다. 일을 그만두고 작별인사를 하던 날, 내 손에 떨구던 아이들의 눈물방울까지 떠올려보면 어린이들은 늘, 내게 체온을 나눠줬다. 귀한 마음을 담아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린이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아이들은 어른에 가까운 사람이 됐다. 10㎝자를 놓고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를 찾는다면 어디쯤일까? 나는 9.99㎝는 어린이, 0.01㎝만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거나 어른이거나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고, 지금도 어린이이며, 앞으로도 어린이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귀한 대접을 받으면 좋겠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