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외곽조직인 ‘마포포럼’이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진보논객 진중권 씨를 초청해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 “저쪽은 종북좌파가 아니라 그냥 잡것이다. 그렇다고 정권이 지금의 야당으로 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여야 모두를 타깃으로, 비판이 신랄하다. 하지만 정작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한 참석자가 물었다. “현재 야권에서 대선 주자가 보입니까?” 그러자 돌아온 건 “여러분들 눈에 안 보이는데 제 눈에 보이겠습니까”라는 반문이었고 폭소가 터졌다. ‘마포포럼’을 만든 사람은 지난 총선 때 불출마 하면서 ‘킹메이커’가 되겠다고 했던 김무성 전 대표다. 김 전 대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 전 대표는 부산 남구와 영도에서 6선을 지냈으니 국회의원만 24년 한 셈이다. 그는 불과 5, 6년전만 해도 문재인에 맞선 보수의 강력한 대항마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 박근혜 탄핵으로 당이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에 자신이 수십년 몸 담았던 조직과 손절하던 행적이 각인돼 있다. 사실 대선 때마다 킹메이커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대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물 간 정객의 잊히지 않으려는 몸부림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속한 진영에 제대로 된 ‘킹’이 없는 걸 반증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지금 야당 사정이 그렇고 그들의 정치 기반인 PK지역이 그렇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가도에 본격적으로 올라탄 사람은 이재명 이낙연 윤석열이다. 이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최대 규모 유권자 집단인 PK를 잡기 위해 일찌감치 운동화 끈을 조여맸다. 하지만 그 속에 PK 주자는 없다. 그나마 여론조사 후보라도 오르는 인사엔 홍준표 의원이 있지만 고향만 경남 창녕일 뿐 TK로 분류된다. 부산 출신인 안철수 대표는 서울시장 선거 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해 발목이 잡힌 상태고, 김태호 의원은 현재로는 지지율 자체가 거론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된다. 지역에 공을 들이는 정치인 중에 김영춘 전 의원이 있으나 잇단 선거 패배로 힘이 많이 빠졌고 경남에선 김경수 지사가 한때 가능성을 주목받았지만 당선 무효 항소심 판결 이후 그마저 희박해졌다. PK 정치인의 존재감은 대선 후보는 언감생심이고 조만간 새로 꾸려지는 야당 지도부에 이름을 올리느냐 마느냐의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된 13대 이래 보수든 진보든 PK가 대선 주자를 배출하지 못한 선거는 한 차례도 없었다. 13대 김영삼, 14대 김영삼 박찬종, 15대 권영길, 16대 노무현 권영길, 17대 권영길, 18대 문재인, 19대 때는 문재인 안철수가 있었다. 이러다가 내년 20대 대선은 처음으로 PK 출신 주자 없는 선거판이 될 수도 있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관점에서 배우와 정치인은 닮았다. 요즘 세대를 초월해 찐어른으로 각광받는 배우 윤여정은 스토리텔링이 분명하다. 20대 화려했던 삶은 잊은 채 자식을 먹이기 위해 몸을 낮추었고,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는 뚜렷한 주관으로 자기 영역에서 뚜벅뚜벅 걸어 마침내 그곳에 닿았다. 정치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을 덧입히면 감동은 배가 된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자기희생은 그 본능을 억제해야만 가능하기에 아무나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진정으로 해낸 사람에게는 배우든 정치인이든 박수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PK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야권 정치인들에게 감동이 없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자생력도 없고 전국적인 경쟁력도 입증하지 못한 채 특정 정당의 당세에만 기대 선수를 쌓다가 막상 거센 역풍에 부딪히면 각자도생에만 급급한 꼴불견만 보여준 것이다. ‘대선 주자 없는 PK’ 책임은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은 현 여권 정치인들에 비해 야권이 클 수밖에 없다. 어리광 받아주며 키운 자식이 밖에서는 전혀 제 구실을 못하는 꼴이다. 이달 초 부산시장 보선의 국민의힘 당내 경선은 또다른 의미에서 기념비적이었다. 명색이 국회의원을 두번 세번 지내놓고 정치신인 박성훈 전 부시장에게조차 줄줄이 패했다. 그게 천적 없이 온실에서 자란 그들의 진짜 실력이다. 이런 풍토에서 대선 후보급이 자란다면 그게 오히려 신기한 일일 것이다.

PK는 한국 현대사에서 늘 태풍의 핵이었다. 3·15 부정선거의 규탄 봉기가 시작되고 유신 종식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단식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낸 김영삼을 키우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바보를 자처한 노무현을 배태하고, 보수 텃밭에 진보의 씨앗을 뿌린 문재인을 만들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탄생한 7명의 대통령 중 3명이 PK다. 30년 이상 한국 정치의 주연이었던 PK가 진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