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대표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한 계기는 1823년 발표된 ‘먼로 독트린’이었다. “아메리카는 유럽 강국의 장래 식민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유럽 여러 나라가) 그들의 체제를 이 반구의 어떤 부분으로든 확장하려는 여하한 시도도 우리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유럽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유럽도 아메리카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먼로 독트린에선 1812~14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이 유럽 강국들과 대등한 ‘양안관계’를 구축한 셈이다.
이후 대서양 양안관계는 우호적으로 발전했다. 1949년 출범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현재 회원국이 30국에 달하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다. 그런 대서양 양안관계에 2017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토 회원국들이 지불해야 할 방위비를 내지 않는다며 주독미군 감축 의사를 밝히고,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는 등 국제질서를 혼란스럽게 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탓이다. 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럽인은 운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며 미국의 그늘을 벗어난 독자노선 추구를 시사했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연패한 뒤 숨죽이고 지내온 독일이 미국의 패권에 이의를 제기한 건 놀라운 변화였다. 미국과 패권을 다투던 과거를 연상케 했다.
유럽연합(EU)의 대표국인 독일이 또다시 미국을 상대로 독자노선을 천명하고 나섰다. 미국의 코로나19 백신 지적재산권 유예 방침에 대해 “백신 수출 제한을 푸는 것이 먼저”라며 반대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은 유럽에서 생산된 많은 백신 물량을 전 세계에 공급했다”며 미국에 백신과 백신 생산에 필요한 원료들의 국제 유통을 촉구했다. 코로나 백신을 둘러싸고 패권 쟁탈전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각각 세계 90여 국과 70여 국에 수억 회분의 자국 백신을 지원한 터라 패권 쟁탈전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백신 춘추전국’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열강의 백신 패권 다툼 속에 접종에서 소외된 후진국의 고통이 가중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미국(44%)·영국(50.8%)·이스라엘(63%) 같은 선진국과 아프리카(평균 0.95%) 등 후진국의 ‘백신 접종 양극화’가 확대되고 있어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처럼 무엇이 인류를 위하는 것인지 국제연합(UN) 차원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