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별세한 농심그룹의 신춘호 회장은 10남매 중 셋째였다. 맞형(신격호)은 돈을 벌어 오겠다며 일본으로 떠나버리고 둘째형은 병약했다. 사실상의 장남 역할이 셋째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 신 회장이 늦깎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업을 병행하며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쌀장사를 하던 곳이 부산 국제시장이다. 국내 굴지의 식품기업 씨앗이 이곳에 뿌려진 것이다. 먼 훗날 시장 한켠의 포목점은 한때 국내 섬유원사 생산의 절반을 차지한 한일합섬으로, 잡화점은 대표적 유통체인 서원유통으로, 철물점은 향토 철강회사 대한제강으로, 속옷점은 패션기업 TBH글로벌로 성장했다.
‘사람이 개미떼처럼 언제나 바글바글 뒤끓고 있는 데다, 한번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은 등과 등을 비비고,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기 마련이다’. 김동리가 ‘실존무’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1950년대 국제시장의 모습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오죽했으면 ‘잡다’ ‘잡아채다’는 뜻의 일본어 ‘토루’에서 파생된 ‘도떼기’가 국제시장의 별칭이겠는가. ‘국제’라는 단어는 수입품이 귀하고 해외 나들이가 힘들던 시절 잘 나가는 모든 것에 붙이던 수식어다. 2000년대 한류붐을 탄 일본 중국 러시아 관광객 덕분에 국제시장은 명실상부 ‘국제적인’ 시장이 되었다.
국제시장번영회가 최근 이사회에서 시장 현대화사업 추진을 의결했다. 중구 신창동 4가 7200㎡ 부지에 지상 2층 2개동 규모인 상가를 헐고 35층 이상의 주상복합건물을 짓겠다는 것이다. 롯데백화점 광복점 개점과 영화 ‘국제시장’ 등에 힘입어 반짝 인기를 회복했지만 온라인 거래 활성화와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다시 활력을 잃은 영향이 크다. 아직은 번영회 자체 결의에 불과하지만 입주 상인들의 의지에 따라 재건축은 언제든 가시화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점포주의 절반이 넘는다는 임대 상인들이 현대화란 미명으로 생계 터전을 빼앗기는 비극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재래시장 투어는 외국 관광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다. 어디를 가도 국제시장만한 볼거리나 먹거리는 흔치 않다. 미로처럼 꼬불꼬불 연결된 골목, 맛있는 냄새를 피우는 좌판과 노점, 물건이 빽빽하게 들어찬 노포의 모습은 정겹고 애틋하다. 하지만 그 속엔 절박한 삶이 있고 살아내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몸부림이 있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면서도 상인과 시민이 자부심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국제시장의 거듭남을 기대한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