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나 신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기적(奇蹟)이라고 한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를 “신에 의한 자연법칙 위반”이라고 했다. 자연법칙을 초월한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다. 그는 “인간의 어떤 증언도 기적을 증명할 만한 힘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증명력을 가지는 건 경험뿐인데, 기적은 그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명할 수는 없어도 기적은 존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5일, 영국군과 독일군이 맞선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크리스마스 휴전’이 한 사례다. “어느 순간 독일군이 우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영국인!’ 하고 외쳤다. 우리도 화답했고, 양측 모두 무기를 놓고 참호를 나와 무인지대로 향했다. 성탄절 자정까지 서로 총을 쏘지 않기로 약속했다.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선물을 교환하며 사람들은 서로 친구처럼 대했다.” “독일군과 올드 랭 사인을 영어, 아일랜드어, 프로이센어, 뷔르템베르크어 등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계속 불렀다. 이것을 영화로 봤으면 맹세코 거짓말이 심하다고 했을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군인들은 그 사건을 이렇게 증언했다. 살기 등등한 전쟁터가 돌연 평화의 광장으로 변했으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강원도 화천에서도 기적이 일어났다. 화천의 118개 농가들은 내달 3일까지 애호박 213t을 폐기할 예정이었다. 코로나19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가격이 폭락한 탓이다. 8㎏ 한 상자가 500원까지 떨어져 팔아봤자 상자값도 안 나오는 처지에 몰리자 폐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지난 25일부터 26일 오전까지 일주일 출하물량과 맞먹는 112t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에 농가들은 즉시 폐기를 중단하고 주문에 응대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룻밤 새 지옥과 천국을 오간 ‘화천의 기적’이다.
두 사례를 보면, 기적은 흄의 정의처럼 신에 의한 현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여전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기적에는 인간의 선한 마음도 작용하는 것 같다. 그대로 두면 비극으로 끝날 일도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이 발동하면 희극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백신 접종이 코로나19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건 아니다. 이런 마음이 모여야 코로나 극복을 앞당길 수 있다. 어쩌면 측은지심이 가장 강력한 백신인지도 모르겠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