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BC403~221) 광활한 만주벌판과 우리 반도에는 엉덩이에 멍이 든 것 같은 푸른 반점을 가진 아기들을 생산하는 부족들이 몰려들어 살고 있었다. 이 반점을 몽골(혹은 바이칼)반점이라 부르며 이 부족들을 인류학에서는 퉁구스(Tungus)라 한다. 1세기경에는 대략 500만 명이 부족별로 나뉘어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북쪽에는 부여족, 그 동쪽에는 숙신(肅愼)족, 만주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압록강 중하류로 흘러드는 동가강유역의 졸본(현, 환인)땅을 중심으로 예맥족이 웅거했다.

BC37년부터 비옥한 졸본 땅에 예맥의 일족이 고구려를 건국하여 강력한 군주국가로 팽창하며 주위의 부여·숙신 등을 정복해 영토를 넓혀갔다. 이때 영토를 빼앗긴 부여족 일부가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반도로 남하했으나 삼한(三韓)에 밀려 검푸른 현해탄을 건너 일본열도로 진입했다. 이 기마민족들은 기동력을 발판으로 일본 열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일본의 문화적 중심부인 나라지역에 진출하여 미개했던 일본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일본열도를 강력한 제국(帝國)으로 개척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왜(倭)이다.

대략 4세기 무렵부터 왜는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저 한반도의 해안을 기웃거리며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397년 백제 아신왕의 태자 전지를, 402년 신라 실성왕의 동생 미사흔을 볼모로 잡아 갈 정도로 세력이 성장했다. 왜가 끊임없이 한반도에 집착해 온 것은 만주가 본래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721년 통일신라 성덕왕은 고구려 옛 땅에 발해가 일어나 신라의 북변을 압박함으로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 일대에 성을 구축하고, 다음해 10월 왜를 막기 위해 현재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3만9000명의 인원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였으므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적대시해 무왕은 왜국에 우호적 사신을 보내 강화를 약속했다. 성덕왕 30년(731) 왜국의 병선 300척이 신라의 동해안을 침범했고 733년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발해를 공격했다. 바야흐로 고대시대의 극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운의 파고가 드높아지고 있었다.

742년 2월 효성왕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평화사절을 왜국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왕은 성무(聖武)였는데 일본 연호 천평14년 2월조(條)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이때 ‘신라사신은 187명이나 되는 대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왜국으로부터 멸시와 푸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같은 해 경덕왕 1년 10월 일본에서 사신이 왔으나 만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신라는 실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신라를 구해낼 방법을 모색하던 경덕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군사적 갈등에서 당나라군을 무찔렀던 방편을 상기했다. 문무왕 19년(679년) 경주 낭산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창건한 공덕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당나라 군대가 태풍에 의해 모조리 수장된 사건을 떠올렸다. 발해와 왜의 연합군이 동해구 앞바다에 나타날 때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경덕왕은 백성을 전쟁의 도탄에서 구제할 방법으로 토함산 정상 부근에 사천왕사와 같이 외적을 무찌를 수 있는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석굴암은 호국불교의 이념을 토대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유행한 밀교적 방법을 채택해 건립된 것이다. 때문에 존상들의 배치가 마치 군대의 전투대형을 그대로 채용해 엄숙한 느낌을 준다. 입구 전실(前室)의 남북으로 네 분(位)씩 총 여덟 분의 팔부신장들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혹은 팔이 6~8개로 변용되거나 여의주를 잡고 있어 밀교를 상징한다. 대부분 신장들은 예리한 창과 긴 칼을 전투자세로 움켜쥐고 적진으로 달려갈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석굴암 전실에 들어서는 순간 살벌한 분위기가 엄습해 온다.

전실을 지나 주실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에 배치된 네 분의 사천왕상 역시 갑옷을 챙겨 입고 모두 긴 칼을 비껴 들고 악귀들을 두발로 짓밟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석굴암보다 약 90년 전 건립한 사천왕사의 사천왕들은 악귀를 깔고 앉아 누르고 있으나 석굴암의 사천왕들은 서있는 자세로 악귀를 짓뭉개고 있는 것을 보면 더 가혹하고 난폭하다.

신장상이나 사천왕들이 남북으로 사열한 것은 북쪽의 발해군과 남쪽의 왜군들을 제어하기 위한 상징적 포진이다. 주실의 석가모니불의 권속들 중 33천을 지배하는 하느님격인 제석천 역시 갑옷을 입고 왼손에 금강저를 지니고 있다. 본존불 뒤에는 국가적 환난에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할 11면관음보살이 최후의 마지노선 임무를 띠고 비장의 무기로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