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난초 그림을 꼽자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것을 들지만,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 1765-?)의 난초 그림을 첫 손에 꼽는 이도 많다. 김정희의 난은 추상화처럼 기이하기도 하고 잡풀처럼 평이하게 그리기도 하는 등 다양하면서도 전통적인 사군자의 모습은 아니다. 또한 민영익의 난초는 격조 있는 귀티는 있지만, 중국 화풍의 냄새가 너무 난다. 이에 비해 임희지의 작품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필치 어느 곳 하나 부족함이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간결하면서도 생명력 있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모습은 그의 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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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희지 ‘난초’. 개인소장 |
임희지는 역관 출신으로 시·서·화를 좋아하여, 중인들의 시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키가 8척이나 되는 큰 몸집을 지녔으며 매우 씩씩한 성격이었다.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한 번 마시면 여러 날 깨어나지 않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일세의 기인이었다. 또한 생황이란 악기를 잘 불었고, 가난한 형편에도 거문고와 칼, 거울과 벼루 등을 잘 갖추어 놓고 지내는 멋쟁이였다. 게다가 예술적 감성까지 예민해 높은 수준에 이른 그림들을 제법 많이 남겼다. 특히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는데, 대 그림은 강세황에 못지않았고, 난 그림은 오히려 강세황보다 낫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세상에 전하는 임희지의 작품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난초 그림이 하나 있다. 그림 속의 난초가 살아 숨 쉬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화면 전체에 세 갈래 긴 난초 잎을 그렸는데, 각 잎은 공간을 삼등분하여 고르게 나누고 있다. 보통 김정희의 작품이 공간 개념이 뛰어나다 하나, 임희지의 이 작품은 김정희의 어느 작품보다도 공간 개념이 더욱 감각적이다. 임희지의 감각적인 붓놀림이 매우 세련되었다. 긴 줄기 아래 짧은 잎 들 사이로 꽃 두 송이가 보기 좋게 피었다. 그런데 이 두 송이가 보통 다정한 게 아니다. 잎 사이에 핀 두 송이 꽃은 마치 서로 정을 나누 듯 몸을 살살 움직이고 있다. 특히 아래 쪽 꽃은 몸을 홱 틀어 올리며 다른 꽃을 쳐다보고 있다. 어쩌면 이 두 꽃은 남녀의 정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작품의 인장과 수결 또한 예술적 경지에 있다. 인장은 둥근 달 같은 모양 안에 ‘물 수(水)’자를 새겨 놓았는데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모습이다. 바로 그의 호 ‘수월(水月)’을 뜻하는 것이다. 이름 글씨도 ‘수월(水月)’이라는 글자를 초서로 아래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듯 썼다. 물이 흐르듯 글자를 구성한 것이다. 이 모든 요소가 수월헌 임희지의 마음을 닮았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그는 ‘달빛에 흐르는 물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속세에서 부대끼며 살기보다는 자연 속에 묻혀 술을 마시며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야만 했던 멋진 서화가였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