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에 제76주년 8·15광복절 경축식이 있었다. 어느 해를 가리지 않고 대통령이 발표하는 8·15 경축사는 대일 메시지가 담기기 마련이어서 큰 관심을 끌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올해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는 일본 관련 부분이 분량이 적어서인지 큰 관심을 불러오지 못했다. 어떤 일본전문가는 이렇다 할 대일 메시지가 없다고 평가하면서 ‘김빠진 맥주’에 비유하는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대일 메시지도 있고, 그 내용도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고 본다.
한일 양국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인해 갈등의 늪에 빠진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 양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이슈는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징용) 문제로 압축할 수 있다. 일본정부가 위안부문제는 2015년 ‘위안부 합의’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한국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징용 문제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어떻게 해서든 이 위반상태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법을 한국정부가 마련하지 않는 한 정상회담 같은 대화를 할 수 없다고 강경 태세를 보이고 있다. 갈등을 빚으면서 시간이 흐르고 관계는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열렸던 G7정상회의 때 문 대통령과 일본 스가 총리가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일본 측이 작정하고 회담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번 도쿄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정상회담과 연계지워 추진했지만 일본정부의 부정적 입장으로 인해 끝내 이룰 수 없었다.
두 계기 모두 한국정부는 매우 유연한 입장을 갖고 한일정상회담을 이루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지점에서 나온 경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대화의 문이 열려있음”을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와 기후 위기 등 세계가 직면한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대화임도 상기시켰다.
대화와 더불어 문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지혜를 모아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며, 이웃 나라다운 협력의 모범을 보여주게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한일 간의 협력을 부각시킨 것이다. 양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유된 가치를 토대로 미래 협력을 확대 발전시켜나가자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양국이 협력해야 할 과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양국 관계에서 대화와 협력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한국 측이 협력을 말하면서 대화를 요구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3.1절 기념사에도 대화와 협력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우리의 요구를 일본정부가 계속 외면해온 것이다.
일본정부는 어떤 속셈이 있어 대화를 거부하고 시간을 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한국에서 문재인정부가 끝나고 다음 정권이 들어서길 기다린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러나 이 판단은 착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정권 교체가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만약 정권 교체가 일어나더라도 차기 정권 담당자들이 과거사 문제를 호락호락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 정부에 호응하는 편이 일본정부에 실리를 안겨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이웃 나라다. 부인할 수도 없고, 변경시킬 수도 없다. 일본에게 한국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웃 나라끼리 잘 지내야 한다는 요구가 거의 조건반사적이다. 지리적 근접성에다 협력까지 더해지면 그만큼 큰 시너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협력을 하는 편이 우리에게나 일본에게나 득이 된다.
일본은 한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한다. 정치지도자들과 언론이 그런 생각을 갖거나 퍼뜨리니 일반 국민이 비슷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문재인대통령을 반일주의자라고 한다. 신뢰할 수 없는 국가이고, 지도자가 ‘반일’이기 때문에 대화를 해봐야 소용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게다가 요즘 일본에는 묘하게도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의식까지 있다고 한다.
일본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방향으로 조성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관계 악화의 책임을 한국에 전가시키는 것은 소아병적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건 말건, 갈등이 지속되건 말건 일본이 아쉬울 것이 없다는 인식은 위험하다. 한국도 장차 똑같은 인식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파국이 오기 전에 과거사 극복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고, 그 시발은 바로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경남대 석좌교수·전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