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는 오래된 질문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저마다 규정하는 바가 다르다. 당연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사물이나 현상이 달리 보이는 것과 같다. 옆에서 사과를 볼 때와 위에서 사과를 볼 때는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보는가도 영향을 미친다. 배고픈 상태에서 보는 사과와 배부른 상태에서 보는 사과는 개념 규정이 다를 수 있다. 언제 보는가도 마찬가지다. 낮에 보는 사과와 캄캄한 밤에 보는 사과에 대한 정의는 다를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사물이나 현상이라도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홍유손이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돌아가신 뒤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됐다”고 말한 것이나 김춘수 시인이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표현했던, 그런 맥락이다. 이 때문에 사건이나 현상이 어떤 말로 규정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국정농단 사태’와 ‘최순실 사태’는 맥락이 다르다. ‘청부고발’과 ‘정치공작’은 전혀 다른 관점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정치는 결과다”고 규정했다. 상대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것도 좋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치인의 기본 활동인 입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자 비타협적 투쟁보다는 상대와의 타협 필요성에 방점을 찍은 정의다. 100%가 아니라 상대와 타협해 70%나 60% 나아가 51%라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018년 7월, 20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이 된 그는 당선 인사에서 “후반기 국회 2년은 첫째도 협치, 둘째도 협치, 셋째도 협치가 최우선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국회의 계절이 돼야 국정이 선순환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세웠던 ‘협치’는 ‘결과로서의 정치’를 꿈꾼 그의 꿈의 언어가 아니었나 싶다.
정치는 투쟁이라는 말도 있다. 정당의 존재 이유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주목한 정의다. 말싸움이든 몸싸움이든 끊임없이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누구는 또 정치는 숫자라고 말한다. 한 표라도 표를 많이 획득한 사람이 당선된다는, 결국은 표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 정치의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본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말도 있다. 도저히 타협이 안 될 것처럼 보였던 사안도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정치의 세계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처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 자체가 정치의 역동성과 오묘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정치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공허하게 들리지만 말은 사상의 반영이고 삶의 투영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은 곧 사람이다. 폐부를 찌르는 말 한마디는 사람을 움직인다. 이런 의미에서 말은 곧 권력이기도 하다. 이제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말에서 나온다. 설득력 있는 말은 대중을 움직여 여론이 되고 그것이 정책이나 인물을 움직여 세상을 바꾼다. 말은 뱉는 것이지만 돌아오기도 한다. 도끼가 되어 자신을 내리찍기도 한다.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능숙하게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핵심을 파악해 간략한 단어로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를테면 ‘군정종식’ ‘세계화’ 같은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논리력이 뛰어났다. 말을 받아 적으면 그대로 기사가 될 정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중적인 언어로 짧고 쉽게 표현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가 대표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녹색성장’ ‘중도실용’ 등 시대의 언어를 썼으나 실천이 말을 따르지 못했다.
지금 여야 대선후보들을 합하면 21명에 이른다. 점차 좁혀지겠지만 역대 정당들의 대선후보 당 경선 과정에 이처럼 많은 후보가 출마한 적은 없다. 이들 가운데 말의 마술사가 있나 생각해본다. 상대를 베는 날카로운 칼 같은 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그리하여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말을 구사하는 그런 후보 어디 없을까. 정치는 말이다.
시사평론가·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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