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24년 전 추석 표정이지만 웬만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정감이 담겼다.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은 이런 것이야’ 하고 넌지시 일러주듯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올 추석은 영 딴판이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온 가족이 모이기가 쉽지 않다. 형제들이 순서를 정해 미리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화상으로 인사를 나누는 신풍속도가 예상된다. 추석 연휴가 이례적으로 길다는 건 또다른 변수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추석 휴무 실시 기업의 72.3%가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쉬는 것으로 나타났다. ‘6일 이상’도 13.1%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름휴가보다 긴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추캉스’(추석+바캉스)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자를 대상으로 8박9일 일정의 스페인 패키지 여행 상품이 등장했다. 그동안 꽁꽁 묶였던 해외여행이 재개되면서 ‘보복 관광’의 가능성에 여행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한꺼번에 터지는 보복 소비의 단면이다. 백신 접종이란 기본 전제에 돈과 시간이 받쳐줘야 가능하다. 단출한 캠핑도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템이다. 유명 캠핑장은 이미 예약이 완료됐다고 한다.
집에서 추석을 보내는 ‘홈추족’과 추석 연휴를 혼자서 보내는 ‘혼추족’도 많다. 이들을 겨냥한 호텔 패키지 상품이 줄을 잇는가 하면 가정간편식(HMR)과 밀키트(간편 요리 세트) 시장이 들썩거린다. 호텔에서 여유를 누리는 것도,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추석 특식으로 삼는 것도 같은 보름달 아래 벌어지는 일이다.
코로나19 탓에 경기 회복이 더딘 만큼 대부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 부산 울산 중소기업 가운데 추석 상여금 지급 계획을 세운 곳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조사가 그 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은 추석이 오히려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아무리 코로나19 사태가 비대면 추석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몰고 왔다고 하지만 따듯한 정을 나누는 한가위 미덕을 잊을 순 없다. 다음 추석엔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뛰는’ 아이들이 “아차, 마스크!” 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코로나19 탓에 가슴에 피멍드는 이웃이 없도록 다짐하는 한가위가 되길.
정상도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