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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환의 두잉세상] 서예의 향기

  • 전호환 동명대 총장
  •  |   입력 : 2021-12-23 19:23:53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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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글 서예를 배웠다. 급한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선친께서 강요하셨다. 몇십 분 동안 먹물을 가는 것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가로 세로 줄 쓰기를 시작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 같다. 1년 후 6학년 때 경남 초등학교 서예대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나 그 이후 붓을 잡지 않았다.

2015년 부산대 총장 당선 후 붓을 다시 잡았다. 당시 부산대는 전국 대학 중 유일하게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했다. 직선제를 반대하는 정부가 총장 임명을 쉽게 해 줄 것 같지 않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한자를 썼다. 고사성어를 익히는 재미도 있었다.

총장실에 걸어 둔 필자의 붓글씨는 나름 외교관 역할을 했다. 공학을 전공한 필자의 서예 솜씨(초보 수준이지만)에 국내외 방문객이 의외라고 했다. 중국과 일본의 방문자는 놀라움과 존경의 예를 표했다. 자연스레 서예 글씨 내용에 대한 담화로 분위기가 좋았다. 가끔 주례를 설 때는 가훈을 써서 신혼부부에게 주었다. 기업을 방문할 때나 대학 발전기금을 내신 분들에게 붓글씨는 좋은 선물이었다.

지난 11월 필자는 마루야마 코우웨이 부산 일본총영사와 서예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2019년 총영사로 부임 후 인사차 부산대 총장실을 방문했다. 당시 집무실에 걸려 있던 필자의 글씨를 보고 그는 같은 글을 자신의 서체로 써서 필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이후 서예라는 공통분모로 필자는 ‘동행(同行)’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함께 열어 긴장된 한일 관계를 풀어보자고 제의했다. 흔히 한일 관계를 비유할 때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말을 쓴다. ‘옷의 띠와 같은 좁은 물’이란 뜻이다. 한국과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깝게 부대끼며 살아온 이웃이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좋은 시기보다 나쁜 때가 더 많았다. 양국 사이의 긴장은 양 국민의 감정까지 격앙시켰다. 지금은 양국 관계가 혼미한 형국이지만, 일의대수의 흐름처럼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동행주원(同行走遠)은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즐겨 쓰는 말이라고 한다. 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 머물 수는 더더욱 없다. 열린 듯 막힌 한일 관계의 물꼬를 트고, 동반자 의식으로 미래를 향해 같이 걷자는 취지를 담은 기획전이었다. 붓으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서예가 아닌가. 서예로 마음을 수행하고 붓을 세워 가물거리는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필자의 14대 조부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1527~1596)은 남명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나이 66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죽음을 앞둔 상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창기의병해 의병장으로 아들 수족당(睡足堂) 전우(全雨, 1548~1616)와 함께 치른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상대 손병욱 교수는 탁계의 행적과 정신세계의 연원 및 학문세계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수족당의 아들, 필자의 12대 조부 두암(斗巖) 전형(全滎, 1609~1660)은 1636년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두암은 일본사행록(使行錄)인 ‘해사일기(海槎日記)’를 남겼다. 두암은 시문과 서예에 뛰어나 일본사람들의 요청으로 시문을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 서예 교본 두암법첩을 남겼고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집안 가보로 내려온 탁계문집 수족당문집 두암문집 등 유교책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부와 부친이 목숨 걸고 싸운 적의 나라에 외교관으로 건너간 두암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입신을 위함이었나. 그러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합천 시골 와류헌정(臥遊軒亭)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산림지사(山林之士)로 살았다.

일본 국민 여론조사는‘한국에 친밀감을 느낀다’고 답한 비율이 35%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20대 이하는 무려 54.5%였다. 이들은 한국 음식, K팝과 드라마 등 K콘텐츠로 한국 여행 놀이를 즐긴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나라 여론조사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에 따라 비율은 달랐지만 Z세대는 그들의 세계관으로 일본을 보고 있다. 성인들도 한일 관계 개선에 많은 지지를 보낸다. 한일 정부 간의 정치·외교·경제적 갈등과 마찰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민간교류와 협력은 장려할 필요가 있다.

서예는 많은 장점이 있다. 정서안정, 인성, 인내심 및 집중력을 길러준다. 옛 성현의 좋은 글귀를 익히니 교양도 높아진다.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고급 선물이다. 특히 나이 들어 돈을 벌지 못할 때 돈 들이지 않고 선물로 줄 수 있다. 잡생각을 하면 붓이 흔들려 바른 글이 될 수 없다. 정심정필(正心正筆), 바른 마음을 가져야 바른 글씨가 된다. 이렇게 좋은 것을 초등학교부터 왜 가르치지 않나. 필자가 근무하는 동명대 두잉대학에서는 서예를 교과목으로 넣었다. 묵(墨)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덕(德)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하지 않나. 묵향으로 정진하는 덕성을 갖춘 인재를 기르고자 함이다. 묵과 덕이 어우러진 사람의 향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동명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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