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바그너는 ‘파리객사’란 음악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 내용은 한 야심 찬 독일 음악가가 성공을 위해 파리에 갔다가 결국은 생활고로 인해 비참한 삶을 마치고 만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사실 19세기 화려한 파리음악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바그너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도피해간 바그너는 파리에서 성공을 노렸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전 유럽에서 부나방처럼 몰려든 음악가들 속에 천하의 바그너도 그냥 천덕꾸러기일 뿐이었다. 18세기 런던도 파리 못지않게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음악가가 몰려들었는데 페스팅이란 음악가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떠도는 옛 동료의 아이들을 보고 음악가를 위한 상조회를 제창했다. 헨델이 기부한 막대한 기부금을 기금으로 하여 이 제도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이러한 상조회는 빈에서도 ‘미망인과 고아를 위한 음악협회’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악단들은 급료에서 공제하고 연금을 만들고 크리스마스나 겨울시즌에 ‘땔감 마련을 위해’란 취지로 자선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의 자선음악회는 그 유래가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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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하임악파로 유명했던 독일 중부도시 만하임. |
당시 음악가 중 최고의 직업은 궁정음악가였다. 지금 같으면 시립악단이다. 그래도 당시 궁정음악가들의 급료나 사회적 신분은 대략 중하였다고 한다. 독일에는 슈타트파이퍼란 시에 고용된 음악가들이 있었는데 길드조직이었다. 이들은 도시의 탑 위에서 성문의 개폐를 음악으로 알리기도 하고 도시의 공식행사나 무도회, 시민의 관혼상제등의 음악을 담당했다. 이 조직은 음악교육도 하였다. 바흐의 부친도 이 슈타트파이퍼 출신이다. 이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그 보수도 올라가 나중엔 궁정음악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정제가 점점 무너지면서 음악가들은 자연히 프리랜서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다들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독일의 중부도시 만하임은 고전시대 소위 만하임악파로 유명했던 도시인데 이 악단의 구성원은 동유럽의 보헤미아 출신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게 당시 음악가들에겐 다반사였다. 이탈리아는 대표적인 음악가 수출국이었다. 그들은 북유럽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루이14세의 총애를 받은 궁정음악가 장 밥티스트 륄리가 대표적인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이다. 그나마 악단에 속하지 못한 개인들은 길거리 연주로 생계를 이어 갔는데 오늘날 유럽의 길거리 연주도 그 유래가 오래된 셈이다.
당시 음악가들의 부업이 또 흥미롭다. 소나티네로 유명한 클레멘티는 피아노 판매와 악보 대여, 악보 출판을 주로 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플레이엘은 피아노제조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본의 궁정악단 호른주자이자 베토벤의 친구였던 짐록도 재빠르게 출판사를 차렸다. 지금까지 유명한 짐록출판사이다. 의외의 부업은 악보필사이다. 지금이야 컴퓨터 때문에 없어진 직업이지만 당시엔 관현악의 총보를 보고 각 연주자의 개별악보를 옮기는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철학자 루소는 작곡도 했고 음악사전을 집필하기도 한 음악가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악보필사를 했는데 “이 일은 큰 벌이는 아니지만 수입은 확실하다. 일은 충분하다. 열심히 하면 먹고사는 일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했으니 의외의 벌이였던 모양이다. 한스 애빙은 ‘예술가는 왜 가난한가?’란 저서에서 “예술의 신화가 과잉공급을 낳고 여기에서 가난의 악순환이 나온다”고 그 원인을 밝히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는 음악가들의 삶을 보며 왠지 그런 이야기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땔감을 걱정하는 자선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이 세모에 생활인으로서의 음악가를 생각해 본다.
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