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새로움의 전령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는 또 한 번의 새해를 맞고 있다. 그리고 새해와 함께 누구든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일 년 더 자란 것이겠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늙은 것이다. 아차,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늙다’라는 말이 금기시된 사회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 웬 말 방정인가. 여기서 늙음은 일흔 고개를 넘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한 말이니 오해 마시기를….
어쨌든 오늘 우리 사회의 정서는 자연의 섭리를 일상의 순리로 받아들이는 데에 인색한 것 같다. 새로운 시간이 오는 만큼 생명체는 성장하고 늙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도 다가온 시간은 새로운 시간이다. 곧 늙어 감으로써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기회를 갖게 된다. 백수(白壽)를 산 사람에게도 2022년은 새로운 한 해이다. 사실 지속적으로 변하는 생명체에게 새로움과 늙음은 단순히 반대 개념일 수 없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필요로 한다. 새로움이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새로이 등장한 것이 영속한다면 새로움의 의미 자체를 소멸시키리라. 바로 이 새로움의 일시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움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과 만물이 무상하다는 것, 곧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종교적 창조론의 입장에서든 천체물리학의 입장에서든, 창세(創世)가 한 번 있은 후(또는 우주의 빅뱅이 한 번 있은 후), 곧 최초의 새로움이 있은 후, 이 세상에서 모든 새로움의 탄생은 변화와 어깨동무한다. 변화는 새로움을 동반하며, 새로움의 얼굴은 변화의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다.
흔히 지나치는 것이지만 신세대 새물결 등의 표현은 내재적 차원에서 동어반복일 수 있다. 세대와 물결은 그 자체로 변화와 새로움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유기적 자생력을 지니지 않은 물체와는 달리, 세대나 물결처럼 ‘자생적 역동성’이 그 존재 조건이라면 그렇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모든 세대는 끊임없이 새롭게 이어지며, 강줄기를 타고 모든 물결은 밀고 밀리며 끊임없이 새롭게 흐른다.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며 흐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강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세대가 구세대를 밀어내며 살아가는 것도 너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사는 세상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 것이 있다. 새로운 세대는 앞선 세대를 버리고 가거나 교체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밀어내며 살아간다. 밀고 밀림의 긴장은 있지만 대립은 없다. 앞선 세대는 순리에 따른 밀림을 수용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기운을 공유한다. 인간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최근 세대를 지나치게 가르고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치와 언론은 ‘세대 갈등과 세대 교체의 이념’을 악용한다. 새로움을 이용하면서도 그것이 변화의 섭리임은 은폐한다. 인간의 삶이란 새로움을 이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간상도 ‘이어감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탁월한 감성의 시인 소월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대립과 교체의 언어는 강렬하나 본질적이며 소중한 것들을 잊게 한다. 권력의 의지로 대선에 나선 정치인들은 허영 가득한 목소리로 ‘시대 교체’도 외쳐댄다. 시대라는 말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 의미에는 이 세상 수많은 인구의 여러 세대에 걸친 과거와 현재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소환해 그를 교체할 미래를 호언할 때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책임감이 확고히 있어야 한다. 새로움에 대한 책임, 그 또한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시대를 논하는 자의 겸허함이 요청되는 이유다.
세대는 자연의 섭리를 반영하지만, 시대는 인위적 의지를 표명한다. 이때 새로움은 ‘다르다’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 다른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창의성’을 발휘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제발 그럴 깜냥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대의 새로움을 위한 대업과 책임을 위해서는 자기반성과 함께, 소환된 시대에 대한 철저하면서도 공정한 평가와 성찰이 전제됨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찍이 청록파 시인 혜산(兮山)이 노래했듯이, 새 날의 태양도 지난밤의 어둠을 살라먹고 솟아오른다. 다시금 ‘말갛게 씻은 얼굴’로 솟아오르는 고운 해도,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솟아오른다. 그래야 새 생명 넘치는 ‘이글이글 앳된 얼굴’로 솟아오를 수 있다.
이렇게 더없이 공을 들여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모두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같은 세상을 희망할 수 있다.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