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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명의 오션 드림] 역사라는 오답 노트

  • 이제명 부산대 교수·수소선박기술센터장
  •  |   입력 : 2022-03-17 19:20:26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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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 인접한 도시 내외곽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컨테이너 운송에는 TEU라는 단위가 사용된다. 길이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가 기본 단위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1만 TEU급 컨테이너 운반선이라 하면 길이 20피트 규격 컨테이너 만 개를 적재하는 운반선이라는 의미다.

컨테이너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석탄을 나르기 위해 마차에 연결하던 나무 상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처음 유래돼 19세기 유럽에 철도 보급이 확산되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철제 컨테이너는 1921년 뉴욕 센트럴 철도회사가 컨테이너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미국의 철도화물 운송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컨테이너를 이용한 대량 운송의 장점이 주목받으며 선박을 이용한 장거리 물자 운송의 방법으로 대중화됐다. 하지만 당시 국가 항구 회사마다 컨테이너의 규격이 달랐고, 제각각의 무게와 모양을 가진 컨테이너의 적하역을 위해서는 선박 한 척당 수백 명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해운산업과 연계된 또 다른 형태의 집약형 노동시장이 형성됐고,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경제적 파급 효과도 매우 컸다.

컨테이너의 역사에는 ‘표준화’를 통해 물류 혁명을 주도한 혁신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현대경제사에도 큰 획을 그은 미국의 운송 사업가 말콤 맥린은 1956년 선박과 트럭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컨테이너를 개발했다. 선적 비용과 노동력의 획기적 감소를 통해 새로운 해운 역사를 쓰게 한 혁신으로 평가받는 기술이었지만 초창기 그의 기술은 마땅한 사용처를 찾지 못했다. 기존 노동시장의 저항과 편견으로 인해 고전을 면하지 못하던 말콤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군용 유조선을 인수해 컨테이너 적재가 가능하도록 개조한 후 직접 그 유용성을 시연해 보이기로 했다. 시랜드(SeaLand)사와 아이디얼 엑스(Ideal-X)호의 탄생이었다.

같은 해 아이디얼 엑스호는 35피트 길이의 컨테이너 58개를 싣고 휴스턴으로 향했다. 낡은 선체와 신기술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5일 동안의 항해를 무사히 마쳤고 말콤의 기술은 획기적인 운송 방법으로 일약 주목을 받게 됐다. 보급이 계속 확산되면서 1961년 미국표준협회는 높이 8피트, 길이 10피트를 기준으로 해서 길이별로 10피트, 20피트, 30피트, 40피트의 4개 규격을 컨테이너 표준으로 정했고 이는 1969년에 이르러 ISO(국제표준기구) 표준규격으로 인정받았다.

컨테이너의 보급은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폭발적 성장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기술의 시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은 낙후된 항구 인프라를 극복하면서 군수물자를 효과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필요했는데 해상 화물을 별다른 처리 없이 육상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컨테이너가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전장에 군수품을 보급하고 귀국하면서 일본에 들러 전자제품을 대량으로 싣고 오는 해운 무역이 미국에서 성황이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수출 경제가 부흥하게 됐고 1970년대부터 대부분의 화물 운송은 컨테이너 운송시스템으로 바뀌게 됐으며 시랜드사는 자연스럽게 세계 최대 해운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신기술 개발과 적용을 통한 신산업 창출에는 혁신적인 도전은 물론이고 이를 통해 실질 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때와 장소 역시 필수적이다. 기술의 발현에는 적절한 시장과 진입 시기가 중요하다. 우리는 신기술 도입과 적용을 놓고 한계와 규제를 이유로 머뭇거리며 기회를 놓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았다. 한계란 어떤 일의 실현이 불가능한 이유의 현재 시점 나열이다. 극복의 대상이지 반대의 논리가 될 수는 없기에 한계 존재 여부가 도전 자체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컨테이너는 원래 없던 기술이 아니었고 당시 기준에서 효용성과 한계를 핑계로 누구도 선박에 적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 도전한 결과 컨테이너는 선박에서는 대체 불가의 화물 운송기술이 됐고 기술의 가치도 극대화됐다. 그리고 경제사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품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은 에너지 패러다임의 대전환 시대다. 물류의 핵심인 선박의 연료도 바뀌고 있다. 연료가 바뀌면 선박의 연료탱크도, 연료를 공급하는 항만 설비도 바뀌어야 한다. 연료로 사용할 새로운 에너지를 운송하는 화물창을 새로 만들어야 함도 물론이다. 늘 그랬듯이 기술적이든 제도적이든 다양한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문제점과 한계에 지레 겁먹고 가만히 있기에는 우리가 맞이할 선박과 항만 시장의 변화 물결이 너무나 크고 거세다.

변화의 시기에 고정관념을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인류의 ‘역사’만큼 확실한 오답 노트가 있을까. 전 세계의 표준 도량형이 미터법으로 통일된 지금도 컨테이너 규격만큼은 미터법을 따르지 않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미국의 힘일까 아니면 표준 선점의 효과일까. 말콤이 그의 전 재산을 들여 아이디얼 엑스호를 건조했을 때 비웃고 반대하던 그 많던 사람은 불과 반세기 후 오늘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22세기 선박과 바다는 또 어떤 모습의 역사를 만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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