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임시헌장은 이날 임시의정원 첫 회의에서 통과된 대한민국의 첫 헌법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이날의 임시헌장 채택을 꼽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바로 임시헌장 제1조에 명기된 내용이다. 2000년이 넘는 왕의 나라가 국민의 나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임시헌장이 밝힌 민주공화국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임시헌장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하다’. 이로써 왕의 나라에서 억압받던 여성(남녀)과 천민(귀천), 가난한 사람들(빈부)이 일체 평등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조항은 1940년 ‘건국강령’의 모태가 된다. 건국강령은 충칭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가 설계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청사진이다.

건국강령 ‘제3장 건국’의 내용 가운데 경제조항 몇 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모든 인민은 노동권, 무상교육권을 가진다.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서는 무상의료를 시행한다. 여성은 경제와 국가와 문화와 사회 생활상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일제와 부역자의 자본과 부동산은 국유로 몰수하되, 몰수한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위한 국영 생산기관에 제공한다.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여성의 야간 노동을 금지한다” 등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대한민국의 ‘오래된 미래’라고 이야기한다. 중국 대륙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한시도 잊지 않았던 해방된 조국에 대한 꿈, 그러나 100년이 넘도록 아직도 실현하지 못한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 선열들이 그리던 민주공화국의 실체를 건국강령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는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위기도 있었다. 선열들의 염원과 달리 나라가 분단이 됐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이 이어졌다.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보고 맥아더가 한 말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국은 초고속 성장의 영광을 전 세계에 과시하면서 경제대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9위, 무역규모는 8위이다. 땅덩어리가 작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1970, 1980년대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민주주의의 꽃도 함께 피웠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느 순간 우리는 88만 원 세대가 됐고, 젊은이들은 꿈을 포기하는 3포 세대가 됐다.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의 N포 시대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이 어느 순간 헬조선이 된 것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은 부동의 1위이고 출산율은 부동의 꼴찌이다.

누군가는 초고속 압축성장 사회의 명암이라고 쉽게 말한다. 지금 열거한 현실 속에서 대다수 국민 하루하루의 삶은 전쟁이다. 그늘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절망이 대다수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느끼는 기본적인 정서이다. 이런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경쟁에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치열하게 분투한다. 각자도생이다. 결과는 과잉스펙, 과잉학력 사회다.

근본적인 해법이 있을까? 헬조선이라는 조어는 우리 사회가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사회가 됐다는 것을 은유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조어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계층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지옥, 헬이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2019년 우리나라의 GDP 대비 사회지출이 12.2%로 OECD 최하위 수준이라는 사실도 작용한다. OECD 평균은 20.0%, 1위가 프랑스로 31.0%이다. 사회지출이 꼴찌라는 팩트는, 사람들이 느끼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절망에 사회가 무심하다는 반증이다.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는 사회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건국강령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제공한다. 오늘날 현실과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그 정신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회의 적극적인 역할이다. 문제는 그 정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새로운 세상에 맞는 실천 과제를 찾는 일이다. 막 정권을 잡아 새 시대를 설계하는 사람들에게 하버드대학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글을 권한다. “완전한 정의가 뭔지를 찾기보다 현실에 있는 명백하고 확실한 불의를 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