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시작되기 전 미국의 과학출판인 존 브록만이 과학자 110명에게 물었다.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컴퓨터 피임약 민주주의 등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다. 그 중 과학저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응답이 함의의 깊이에서 단연 눈길을 끌었다. 그는 ‘지우개’를 꼽았다.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은 물론 문화,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지우개는 성찰과 참회를 상징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사실(현재)에 입각해 과거를 부단히 성찰한다는 얘기다.
‘지우개’는 위정자가 특히 선호한다. 정적을 부정하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정치적 지우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단적인 예다. 그는 2017년 1월 취임하자마자 앞서 재직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지우기에 나섰다. ‘오바마 케어’(국민건강보험개혁법) 폐기, 반이민 행정명령, 자유무역협정 폐기 및 재협상,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이란핵협정 탈퇴 등 거의 모든 국내외 정책에서 오바마와 입장을 달리했다. 이른바 오바마만 아니면 된다는 ‘ABO’(Anything But Obama)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지난해 1월 취임한 지 5시간 만에 파리기후변화협약 복귀,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절차 중단 등 트럼프의 정책을 뒤집는 17개 행정명령을 발령했다. ‘ABT’(Anything But Trump)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윤석열 정부의 문재인 전 대통령 정책 지우기가 활발하다. 그 대상은 외교·안보, 부동산, 원전, 복지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검찰에 이어 군과 경찰 고위인사도 물갈이했다. ‘ABM’(Anything But Moon)이다. 노동자 사망 등 중대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지난 1월 시행한 중대재해처벌법마저 개정할 움직임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산업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일종의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며 법 개정을 시사했다. 현재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어도 사망사고가 속출하는 마당에 법을 완화한다면 노동여건 악화가 불가피하다.
잘못된 정책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올바른 정책과 제도를 확대하지는 못할 망정 개악하는 건 곤란하다. 바이든의 ‘ABT’처럼 반작용을 부를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을 부정하는 ‘ABY’(Anything But Yun)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