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됐다.” 지난 3월 21일, 정계 은퇴 발표에서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했던 말이다. 이 발언은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를 대표하는 그의 정치적 지향을 보여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민주주의로 승화하려는 노력이 거대담론의 영역이라면, 생활정치는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활동무대임을 시사한다.
김 전 장관의 3개월 전 발언을 새삼스럽게 꺼낸 건 그의 은퇴를 재론하려는 게 아니다. 거대담론의 시대가 퇴조했다는 그의 견해에 동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6·1 지방선거를 통해 드러난 지방의회의 현실이 그 계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금의 지방의회는 다양한 민의가 반영되는 민주적 대의기관이 아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생활정치의 구심체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특정 정당들이 권력을 쥐고 다른 정당의 진입을 막는 비민주적 기형물로 변해가고 있을 따름이다.
먼저 부산의 실태를 보자. 국민의힘은 6·1 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47석 중 45석을 차지해 2018년 지방선거 전의 독점체제를 회복했다. 아울러 16개 구·군의 기초의회는 무소속 1석을 제외하곤 국민의힘(104석)과 더불어민주당(77석)이 의석을 나눠 가졌다. 광역의회는 2018년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듯이 권력이 바뀔 때가 있지만, 기초의회는 늘 거대 양당이 의석을 분점해왔다. 그러면서 지방의회는 정치적 다양성의 금단지대라도 되는 듯 제3 정당의 진입을 차단하려고 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남의 기초의회 의석은 국민의힘 172명, 민주당 80명, 무소속 18명이다. 울산도 국민의힘 30명, 민주당 18명, 진보당 2명의 분점체제다. 제3 정당이나 무소속이 있지만 소수여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전국적으로는 국힘 1435명, 민주당 1384명, 정의당 7명, 진보당 17명, 무소속 144명으로 거대 양당이 전체 의석의 94.7%에 달한다. 마치 나라가 거대 양당에 의해 분할 점유된 느낌마저 든다. 이 때문에 의회 진입 가능성이 낮은 소수 정당과 무소속 후보의 출마 포기가 속출했다.
더 큰 문제는 기초의회 분점체제를 구축하는 주체가 바로 거대 양당이라는 점이다. 올해 부산시 선거구획정위원회는 기초의원 2인 선거구를 44곳에서 18곳으로 줄이는 대신 3인 선거구를 23곳에서 27곳으로 늘리고, 4인 선거구를 10곳 신설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한 시의회는 4인 선거구와 3인 선거구를 각각 1곳과 25곳으로 줄이고, 2인 선거구를 39곳으로 대폭 늘렸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안정적으로 1석씩 확보할 수 있는 2인 선거구를 전체의 60%로 만든 것이다.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시의회의 다수였던 2018년 지방선거 때도 거대 양당은 분점체제를 노리고 4인 선거구를 모두 2인 선거구로 쪼개 버렸다. 의회를 분점할 수 있는 여건을 거대 양당이 직접 만들어 가니 권력 사유화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그 폐해는 무투표 당선을 통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6·1 지방선거에 부산에서 35명이 투표 없이 당선됐다. 2018년(10명)의 3배가 넘는다. 사상구의회는 무투표 당선자가 의원 9명 중 6명이나 된다. 전국적으로는 494명으로, 4년 전(86명)의 5배를 웃돈다.
무투표 당선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선거공보물도 발송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출마 사실조차 알 수 없는 ‘유령 당선인’이다. 흉악한 전과가 있어도 사전에 걸러낼 수 없다. 시민의 참정권 침해는 물론 선거 자체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유발해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그 배후에는 지방의회 선거 룰을 좌우하는 거대 양당의 중앙당이 버티고 있다. 다수 국민이 중대선거구제의 전면 시행을 바라는데도, 중앙당은 전국 11곳의 시범도입으로 제한했다. 중앙당이 지역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가운데 지역민은 정치에서 소외돼 버렸다. 최선의 대안은 정당법 개혁이다. 현행 정당법은 중앙당을 수도에 두고, 5개 이상의 시·도당을 두도록 했다. 지역민으로 구성된 ‘지역정당’ 활동은 불가능하다. 정치의 수도권 중심주의인 셈이다.
지역 문제를 중앙당의 통제를 받고 처리하는 건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다. ‘온천천 생태당’ ‘낙동강 하구 보존당’ ‘금정산 지킴이당’ 등등 지역 문제는 사정을 잘 아는 지역민이 정당을 만들어 직접 해결하는 게 옳다. 그것이 바로 일상 속에서 해법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는 생활정치다. 지역정당 활동의 활성화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거대담론을 넘어 생활정치로 들어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경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