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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아큐와 돈키호테

한국의 홀대받는 약자들, 아큐의 절망서 벗어나고

돈키호테 같은 중산층은 내로남불 잣대 각성해야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6-15 19:53:00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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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던 책이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단순히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비굴하고 자신보다 약한 자는 못살게 구는 아큐의 모습에 분노를 느껴서만이 아니었다. 루쉰이 의도한 사회계몽 정신을 내가 크게 공감한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수시로 무뢰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임에도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아큐의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이란 용어가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현실을 타개하러 나서기보다 늘 스스로를 합리화하곤 했던 것이 아닌지 간담이 서늘했던 것이다.

얼마 전 절친한 후배의 SNS 담벼락에서 마침 아큐정전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때 그 기억이 나서 무심코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아큐에 대한 다른 분의 새로운 해석을 듣게 되었는데 예전엔 알 수 없었던 큰 울림이 있었다. 한마디로 생존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만큼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냉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큐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 위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정신승리법은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약자들이 인생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뇌 속에 박힌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러니까 아큐의 정신승리법도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 고치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았으리라.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장기간의 경험과 문화가 축적되고 쌓인 개인의 무의식적인 습관과 취향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는데, 그는 아비투스가 성장배경과 가치관, 종교와 사상, 권력이나 계층과 같은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아큐와는 또 다른 차원의 아비투스를 가졌을 소설 속의 인물이 생각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 키호테(Don Quixote)’의 주인공 괴짜 기사 돈키호테 말이다. 귀족 신분으로 한가롭기 그지없었던 돈키호테는 기사(騎士)소설을 많이 읽고 스스로 세상을 구하는 기사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정의롭고 숭고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세상을 돌아다니며 적들을 무찌르느라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실상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놓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컨대 돈키호테가 용감하게 맞서 싸운 거인이 실제로는 풍차였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돈키호테는 아시다시피 주변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자신이 정의로운 기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망상에 사로잡혀 주변의 대상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행동했다. 이는 시골에 살았어도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층이었던 귀족의 신분인 데다가 그들 사이에 오랫동안 형성돼 있었던 기사도(騎士道) 정신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루쉰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서 ‘아큐정전’을 썼고, 세르반테스는 지배층의 도덕적 허위의식을 풍자하기 위해 ‘돈 키호테’를 썼다고 한다. 과연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계몽되어야 할 아큐가 더 많을까, 도덕적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돈키호테가 더 많을까.

돌이켜보면 1980년대 한국에서는 수많은 대학생이 정의감에 넘쳐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기도 했다. 그들은 어쩌면 아큐처럼 정신승리에 익숙했던 대중을 계몽하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계몽은 실수도 많았으나 순수한 진정성을 갖고 있었기에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들은 이제 중산층이 되었고 더 이상 사회적 약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낮은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타인에 대한 계몽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 그들 중 일부는 돈키호테처럼 정의의 이름으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다지만 한국 사회의 상대적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4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노인 세대의 빈곤율과 청년 세대의 절망감은 동시에 커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혐오와 차별은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아큐처럼 정신승리를 되뇌며 피폐하고 신산한 삶을 인내하고 있다.

한국은 이제 아큐와 돈키호테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 와 있다. 아큐처럼 살면서 홀대받아온 사람들에게는 경제사회적 안전망을 우선적으로 제공해서 그들이 정신승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민적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돈키호테처럼 살던 중산층들에게는 내로남불의 이중 잣대에서 벗어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구체적 제도개혁에 동참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아큐도, 돈키호테도 함께 각성하는 세상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홍규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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