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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허무주의의 시대

한국 사회 덮친 허무주의, 정치에 대한 환멸서 비롯

도피하고픈 현실이라도 대안 마련 노력 계속돼야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6-29 20:10:09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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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가의 1919년도 작품 ‘중세의 가을’은 저물어가는 중세기의 유럽을 늦가을 정취로 묘사한다. “세계가 500년가량 더 젊었을 때 모든 것의 윤곽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명확해보였다. 고난과 기쁨, 역경과 행복의 대조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든 경험은 아직 사람들의 마음에 어린 시절의 쾌감과 통증이 지니던 직접성과 절대성을 행사하고 있었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로 간주되는 14~15세기의 유럽을 다가올 근대문명의 기원이 아니라 아직 질박하고 원초적이었던 낡은 중세의 임종 과정으로 묘사하는 이 보기 드문 역사책은 학술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다. 고명한 역사가의 애수를 띤 필치는 그가 다루는 시대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준다.

이 책이 출간된 1919년은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기였다. 초유의 전쟁이 끝나고 아직 유럽 지식계는 전쟁 이전의 좋았던 시절, 이른바 ‘벨 에포크’의 빈자리를 메울 만한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유럽인들이 온 세계를 주름잡던 19세기의 영광은 이제 꿈결 같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중세의 가을’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당대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은 그러한 분위기는 적어도 지식사회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만연되어 있었다. 유럽 열강들이 제국주의 팽창의 절정에 달해있던 19세기 말엽에 지식계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시대를 몰아치던 산업화와 정치사회적 혁명의 흐름은 새로운 엘리트인 산업가와 기술자, 그리고 관료층의 사회적 상승을 초래한 반면, 전통적인 지식인층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 기존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기반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문사(文士) 계층은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고리타분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사회의 ‘세속화’와 ‘대중화’ 혹은 ‘물질만능주의’ 경향에 대하여 도덕적 비판을 반복했다. 이들 지식층을 엄습한 무기력감과 환멸의 정신을 독일 철학자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 지성사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갖가지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계급적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폄하하면서 사회 구조의 변혁을 대안으로 제시했으며 니체나 도스토옙스키는 부르주아적 도덕의 허식을 폭로하고 인간 내면의 파괴적 권력욕을 끌어내어 승화시키고자 했고 프로이트는 인간 무의식에 잠재한 성적 욕망을 문제 삼으며 그 욕망을 이해하고 출구를 열어주라고 충고했다. 한 시대의 죽음을 노래한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원초적 문명에서 안식처를 찾으려는 것은 자신의 당대에 대한 깊은 혐오감의 표출이었다. 세계대전의 결과로 기성 질서의 완전한 폐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하던 20세기의 현실에 직면하여 도덕적 비판마저 포기하고 아예 지적인 도피 행각에 나선 것이다.

기성적 가치의 부정과 환멸은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만연해있다. 물론 그것은 옛 유럽의 허무주의처럼 고뇌에 찬 도덕적 회의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사가 다 그런 거야’라는 투의 섣부른 도덕적 투항에 가깝다. 별 대책도 없이 의롭게 살려는 ‘가오’보다는 신경질 투의 ‘법대로 해라’가 지배적이다. 법조인들이 그다지 공정하게 기소하고 판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어차피 유전무죄의 사회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가 거의 실종된 마당에 믿을 것이라고는 개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과 연줄뿐이다. 사회를 개혁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상론은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저 꼰대의 발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사회정의와 공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한국식 허무주의는 마땅한 극복의 노력마저 잠식하고 있다. 차라리 호이징가처럼 먼 과거로, 혹은 먼 타국으로 도피하고 싶어진다. 이 정신적 폐허 위에서 과연 아직도 그럴싸한 대안을 논할 수 있을까? 겉으로는 구름을 뚫고 비상하는 듯 보이는 대한민국이 어찌하여 안으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허무주의의 안개에 휩싸여 있는가? 올림픽 메달 하나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기뻐하던 국민이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소식에도 오히려 상당수가 박탈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내 아파트 가격이 한없이 올라도 더 오른 옆집이 한없이 부럽다.

이런 와중에 우리 대중음악과 영화가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사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융성보다는 마치 19세기 유럽의 사상과 예술처럼 허무주의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환멸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허무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은 것 같아 정말 다행스럽다.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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