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무대미술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원로 연극인 고 이병복 선생은 구술 인터뷰에서, 자신은 배우들이 반드시 공연 일주일 전에 미리 완성된 무대의상을 입고 연습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의상도 나름의 영혼을 품은 한 명의 연기자이기 때문에 무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스태프의 장인적 정신과 태도를 몸소 실천한 뒷 광대인 그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렇다. 그녀의 그 철학적 화두는 창작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희곡의 등장인물, 소설이나 동화 속의 인물은 창작자인 작가의 피조물이긴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는 하나의 엄연한 인격체로 존재한다. 자신이 창조했다고 해서 작가 마음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거나 함부로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작품 속에서 그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이다. 동화에 있어서 등장인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곧 주 독자인 어린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 값하기 때문이다.

내가 희곡을 쓸 때 가장 정성을 들이는 부분이 인물 창조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장 먼저 등장인물의 성격을 항목별로 구체화한다. 성격이 개성적이고 서로 달라야 갈등이 생기고, 갈등은 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유사한 행동의 묶음이 장면이 되고, 또 그런 엇비슷한 장면이 모여 하나의 사건을 만든다. 이러한 사건들이 논리적인 인과관계의 법칙 아래 질서 있게 배열된 것이 곧 플롯이라는 서사가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서사 집합체인 희곡은 인물의 성격에 의해 형성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희곡의 대사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공연을 볼 때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감정 표현을 눈여겨보고, 또한 화술의 정확성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인물의 개성이 모두 달라 그들의 화술 역시 차별화되어야 한다. 이 인물이나 저 인물의 대사가 엇비슷한 경우는 극작가가 인물을 잘못 창조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성격과 개성이 다른 등장인물인데도 화술이 비슷한 것은 연출자나 배우의 화술 훈련이 올바르게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대사 역시 물 흐르듯 막힘이 없어야 한다. 언어에 대한 압축과 절제를 소홀하게 하면 그런 불상사가 생긴다. 시인이 희곡을 잘 쓸 수 있다는 말은, 곧 시의 생명이 시어에 대한 압축과 절제에 있듯이 연극의 대사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천재 극작가 셰익스피어도 소네트를 썼고, ‘피의 결혼’으로 유명한 스페인 극작가 가르시아 로르카도 시인 출신이었다.

희곡 속의 등장인물도 영혼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을 표현하는 배우들은 모름지기 등장인물을 살아있는 인물로 형상화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무대 위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다 당위성이 있어야 하고, 무대 위의 모든 사물 역시 하찮은 것 하나 없어 그 나름 대로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인격체나 다름이 없다.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빈부 귀천을 떠나 모두 나름대로의 영혼을 지닌 인격체이다. 어느 누구든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인간 마음속의 그것을 ‘신성’이라 이름 붙였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신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밖으로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다운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신성이 바깥으로 드러난다고 그는 나름대로 규정했다. 사람은 모두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찌 그런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희곡을 쓸 때 인물 창조에 공을 들이고, 그들이 하는 말에 정성을 쏟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 속의 인간관계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씁쓸하다. 인간관계가 사물화되어 가고 있다. 그 속에 간직되어있는 영혼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물성적 사고와 인식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길섶의 잡초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허투루 대할 일이 아니다.

김문홍 극작가·부산공연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