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소서였다. 나무가 짙푸르고 풀들이 무성해지는 절기로, 과일과 소채가 풍성해지며 나락 알이 차는 시기다. 바야흐로 생명이 넘쳐나는 본격적 여름의 초입, 하지만 우리의 들판은 시름에 겹다.
이상기후가 올해엔 극심한 가뭄으로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른 봄 시작된 긴 가뭄에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농민은 애가 탔다. 하지 전후 수확한 감자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잘다. 양파와 마늘도 씨알이 작고, 밭작물들은 땡볕에 잎사귀가 말리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쌀값마저 폭락해 걱정거리를 더한다. 조생종 벼 수확이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미곡처리장 창고마다 작년에 거둔 벼 가마가 쌓여 있다고 한다. 지난해 이맘때보다 쌀값이 16%나 떨어졌다.
시름 깊은 농촌에 또 하나 사나운 태풍이 들이닥치기 직전이다. 이름조차 난해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지난 정부 말기에 가입을 결정했고 윤석열 정부도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확대 등을 명분으로 밀어붙일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일본의 주도로 캐나다 호주 베트남 칠레 등 11개 나라가 협정 맺은 이 경제동맹체는 농수산물과 공산품의 역내관세 철폐, 외국인 투자규제 완화, 이동의 자유화, 데이터 거래의 활성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10월 중국과 대만이 가입을 신청하면서 전략적 위상이 높아졌고, 우리 정부도 대만에 반도체 시장을 선점당할까 봐 서둘러 가입을 추진했다.
CPTPP 가입이 수출 중심의 제조업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협정국 대부분이 농산물 경쟁력에 우위를 갖고 있어 우리 농업에 치명타를 안긴다는 점이 문제다.
1995년 WTO에 가입하고 2004년 한-칠레를 시작으로 58개국과 FTA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 농업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했다. 그동안 식량자급률은 29.1%에서 19.3%(2020년)로 크게 떨어졌다. 쌀을 제외한 4대 곡물 중 밀 자급률이 0.5%, 옥수수 0.7%. 콩이 6.6%에 그친다.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국민의 생존권이 달린 먹거리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식량주권은 실종 상태다. 이 판에 관세철폐율 96%로 사실상 시장이 전면 개방되는 CPTPP까지 가입한다면 우리 농업은 말살 지경이 될 게 뻔하다.
기후위기 시대 식량문제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 과제다. 지구촌 전역에서 일어나는 기후재앙은 언제 곡물대란을 부를지 모른다. 당장 내일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코로나19 이후 지난 2년 새 수입 곡물값은 47.2%가 올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수입 밀값은 지난해보다 52.3%나 폭등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농업의 식량 자급 기반이 파괴된 데에는 잘못된 경제정책의 탓이 크다. 지난 시절 경제발전 산업화란 미명으로 농업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켰다. 1950년대 잉여농산물 수입으로 식량 생산기반이 파괴되고 1960, 1970년대 저곡가-저임금정책은 농촌공동체를 거덜 냈다. 1980, 1990년대엔 공업 중심의 수출정책이 농촌을 후방 보급기지로 만들었다. 이처럼 수출입국과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농업이 천시되고, 그 결과 우리 농업은 빈사지경으로 내몰린 것이다.
문제는 농업이 무너지고 식량 자급력이 훼손되면 국민의 생존과 건강권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기후위기 속에 각국이 식량자급을 위해 국가역량을 우선 투입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다. 식량자급률 100%가 넘는 선진국들이 식량안보에 박차를 가하는 것을 보면 알 일이다. 유럽연합(EU) 국가의 농가들은 소득 70%를 환경직불금 형태로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한때 식량난으로 수천만 명을 희생한 바 있던 중국은 농업 보조금의 집중적 투입으로 식량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농정은 코앞에 닥친 위기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 여전히 농업을 경제성장에 별 소용없는, 돈 안 되는 산업으로 치부하며 홀대한다. 그런 가운데 농촌 구성원의 노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농지는 산업용지로 태양광발전단지로, 심지어는 쓰레기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2010년 171만5000㏊였던 농지면적은 2019년 158만1000㏊로 크게 줄어들었다. 조만간에 마지노선인 150만㏊로 쪼그라들 것이라는 염려가 나온다.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농업에 대해 정치권은 무관심하다. 정부의 농업정책은 심각한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곡물이야 돈만 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다는 단세포적인 사고에 갇힌 채다. 오늘 한국경제를 좌우하는 자본들은 농지를 산업용지로 바꿔 토지효용을 높여야 한다는 망언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그런데 십 년 뒤, 아니 당장 몇 해 뒤 우리의 밥상은 제대로 지켜질까? 기후재앙으로 세계 곡물 수급에 이상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할 건가? 수백조의 유보금을 쌓아놓은 재벌에겐 법인세를 줄여주면서도 생존의 기본조건인 농업을 살리는 데는 너무 인색하기만 하다. 우리의 미래가 걸린 식량문제에 대해 국민적인 관심을 모아야 할 때다. 국익을 내세우면서 나라의 근본인 농업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CPTPP 가입을 용인하는 어리석음은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장병윤 한살림부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