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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

‘수호신이 자기 도시 버렸다’ 고대인도 언어로 정치선전

익숙한 말·글에 갇힌 현대인, 언론의 자유 제대로 못 누려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8-10 19:54:45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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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은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말과 글은 인간의 숨을 타고 나와서 그런지 자기 나름대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뜻은 다른 사람의 입이나 손을 통해 전달될 때 다른 색깔을 입기 쉽고 다른 틀에 담겨서 다른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말과 글이 살아서 성장하고 나름대로의 인생을 사는 것만 같다.

물론 음성이나 글자가 생명체가 될 리는 없고, 말을 듣거나 글을 읽은 자가 자기의 목적에 따라 처음에 들은 말이나 읽은 글을 변형시키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후대에 변형된 형태의 말과 글이 더 오랫동안 살아남으며, 사람들은 그 말이나 글이 처음부터 그런 뜻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틀 안에 갇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쓴 수메르인들은 도시문명이 발전하면서 벌어지는 정복전쟁의 현장을 신화적인 언어로 묘사한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과거에 융성했던 도시국가가 멸망한 일을 돌이키며 슬픈 시들을 지어 남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림(Urim)을 위한 애가’가 있다.

이 시는 신들이 수메르 땅을 떠나고 신전에 바람만 분다는 말로 시작하는데, 제목에 나오는 도시 우림을 지키는 수호신 난나(Nanna)와 닌갈(Ningal)도 그 도시에서 얼굴을 돌렸다고 읊는다. 그러자 도시들이 신음하고 탄식하였으며, 폭풍우와 화재가 덮치면서 온갖 재난들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자연재해나 정치적 세력약화로 고생하는 이유를 수호신들이 뭔가 언짢은 일이 있어서 그 도시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주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시는 우림의 수호신들 중 여주인인 닌갈이 도시의 운명 때문에 도움을 청하며 폐허가 된 도시 바깥에 서서 운다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갑자기 문맥이 바뀌며 이렇게 말한다. “난나여, 재건된 도시가 당신 앞에서 그 가지를 뻗어 나가기를! 거룩한 별처럼 사라지지 않고 당신의 눈 앞에서 운행하기를!” (425-426행)

다시 말해서 이미 우림을 재건했기 때문에 수호신들이 자기 도시를 버린 적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림은 지배력을 회복한 수메르 왕조가 주변지역까지 그 위세를 떨치는 강대국을 세우고 수도로 삼은 곳이다(우르 제3 왕조, 기원전 2112-2004년). 그러므로 ‘수호신이 자기 도시를 버렸다’는 주제는 영광스러운 현재를 돋보이게 하는 문학적 장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주제는 애가라는 문학양식 안에 갇히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른 작품들 속에서 부활한다. 후대 아수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이 들어서는데, 아수르 왕들은 자신의 군사원정과 건축사업을 묘사하고 기념하는 글을 많이 써서 남긴다. 즉 이런 문서는 권력자의 업적을 기리며 정치적 선전을 하기 위해서 기록했는데, 여기에도 위에서 언급한 주제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씬악헤에리바왕은 현대의 시리아와 튀르키예(터키) 국경 지역에 있는 타우루스산맥 남부 주디 산(Mount Judi) 바위벽에 자신의 문서를 기록하여 남겼다. 학자들은 이 글이 씬악헤에리바 왕 제5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기원전 697년), 왕이 이 지역에 있었던 도시 여러 개를 점령한 일을 적어 놓았다. 씬악헤에리바는 이런 도시들이 산꼭대기에 독수리 둥지처럼 앉아 있어서 위대한 자기 선조들도 점령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본인이 이곳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왕으로 다스리던 시대가 오면서 그들의 신들이 그들을 떠났고 그들의 세력이 약해졌다.” (21-24행)

그러니까 지금까지 산지 도시들은 자기 수호신들의 보호를 받아 가며 아수르에 저항했는데, 신들이 아수르 제국의 지배를 허락하고 산지 도시를 버렸으므로 자기가 이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호신이 자기 도시를 버렸다’는 주제는 이제 내가 사는 도시의 재건을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편 도시를 군사적으로 침략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언론과 대중매체가 발달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도 말과 글은 목숨이 아홉 개는 있는 것처럼 탈피와 변신을 거듭하며 왕성하게 번식하고 있다. 그래서 논란과 의혹은 자기 뿌리를 잘라 버리고 새롭게 부활하며 하늘을 지배하고, 대중은 이미 익숙해진 말과 글의 틀에 갇혀 벗어날 줄을 모른다. 언론의 자유는 자유롭게 창작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필요한데, 의도적으로 익숙하게 만든 말과 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국민이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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