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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고르비와 냉전

  •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
  •  |   입력 : 2022-08-31 19:55:57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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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자’. 그제 타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거론되는 평가다. 1989년 12월, 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제2차 세계대전 후 40여 년 이어오던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만이 정할 수 있다”며 타국의 개입 권리를 규정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함으로써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 자유의 봄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에게 ‘고르비’라는 애칭이 붙은 연유다.

그런데 냉전 종식자라는 고르비에 대한 평가가 앞으로도 존속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러시아 간 냉전이 재개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르비가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데 있다. 199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소련의 회담 때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 국무장관은 독일 통일에 대한 소련의 협력 대가로 “나토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는 철통 같은 보장을 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고르비는 이를 믿고 독일 통일을 용인했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의 행태는 반대로 나아갔다. 1997년 헝가리·체코·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한데 이어 2004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발트 3국도 나토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까지 나토 가입을 추진하다 지금의 전쟁 상황에 이르렀다. ‘나토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이라는 얘기다.

미국은 나토 비확장 약속을 부인한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나토는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들(미국과 나토)이 우리를 속였다”고 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미·소의 당시 약속이 ‘구두’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푸틴은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아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며 고르비를 원망하기도 했다. 고르비에게 냉전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였다.

미·러 간 ‘나토 비확장 약속’ 논란은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와 미국 간에도 비슷한 갈등이 불거졌다.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금지해 현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만든 것이다. 양국의 자유무역협정에 반하는 데다, 지난 6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방한해 동맹관계를 안보에서 경제·기술로 격상하기로 한 뒤 내린 결정이라 당황스럽다. 조변석개하는 국제관계가 살벌하다.

이경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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