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만큼 매혹적인 것이 있을까. 마음 속속들이 비출 듯한 밝은 달빛을 보노라면 거리로 나가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달을 닮은 사람들이 달 속에서 웃고 있네요//티 없는 사랑으로/죄를 덮어주는/어머니 같은 달빛//잊을 것을 잊고/순하게 살아가라/조용히 재촉하는/언니 같은 달빛//슬픈 이들에겐/눈물 어린 위로를 보내는/친구 같은 달빛’. 이해인 시인이 시 ‘달빛 인사’에서 비유했듯이, 어머니·언니·친구의 얼굴로 다가오는 달빛을 어찌 집 안에서 맞이할 수 있겠는가. ‘달빛기행’이란 이름의 밤길 걷기 행사가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밤길은 시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최근 글로벌 수하물 보관 서비스 업체 겸 여행사인 ‘바운스’가 34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2022년 여성 혼자 여행하기 안전한 나라’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여자 혼자 밤길 걷는 안전도가 21위에 그쳤다. 지난해 6월 실시한 서울지역 1인가구 조사에서는 설문 대상자의 62.6%가 혼자 밤길 걸을 때 두렵다고 답했다. 2020년 통계청 사회조사에서도 여성의 49.8%가 밤길 걸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운스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양성평등 지수와 여성 상대 폭력에 대한 인식 수준은 모두 32위로 꼴찌에 가까웠다. 그 결과 종합순위는 19위를 기록했다.
이런데도 정부의 양성평등 정책은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1일부터 오는 7일까지 양성평등주간 행사를 진행 중이지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미성년자를 협박해 성착취 영상을 제작한 ‘제2의 n번방’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정부는 불법 촬영물 삭제를 지원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추가 설치 비용을 내년 예산안에 편성하지 않았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여가부는 또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요구에 따라 성평등 문화추진단 사업을 전면 중단했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여전히 “여가부 폐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양성평등은 태풍 속 낙엽 신세나 다름없다. 2014년 양성평등법을 전면 개정해 일과 가정의 양립을 통한 실질적 남녀평등을 추구해왔으나, 윤 정부가 들어선 뒤 제동이 걸렸다. “성평등과 페미니즘이 그렇게 중요하면 자기 돈과 자기 시간 내서 하면 된다”는 반론을 만나면서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정부·여당의 반대 기류에 양성평등 잎사귀는 이내 떨어질 듯 위태롭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한다.
이경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