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이중섭은 40세 되던 1956년 서울에서 요절했다. 그의 그림은 한국평론가 몇 사람들에 의해 ‘야수파’ 즉 프랑스말로 ‘포비즘’으로 분류됐다.
폴 고갱이 1903년 남태평양 타이티섬에서 사망함으로 후기인상파의 막이 내려졌다. 이어 1904년 초연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유럽에서 선풍적으로 유행할 즈음, 프랑스에서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에 의해 주도되었던 새로운 풍의 화파인 야수파가 등장한다. 야수파의 특징은 아라베스크처럼 현란한 원색을 구사해 후기인상파의 색채를 보다 강조하고 추상적 방향으로 진일보시켰다. 이때 강조된 원색들의 퍼레이드가 문명사회의 미술 문화를 등진 야수적 표현이라 하여 야수파라 명명된 것이다.
마티스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관람하고 감명을 받아 그린 1905년 작 ‘물가의 일본처녀’ ‘콜리우르 풍경’은 당시 유럽화단에 이어져 온 역사와 전통을 내팽개 쳐 버린 야수적 내용이라 평할 수 있다. 이 명칭이 생겨난 계기는 그해 가을 살롱 전에 벽면에는 그림이 걸리고 그 전시장 중앙에는 조각가 마르케의 청동조각 한 점이 놓여있었다. 이 조각 작품을 보고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야수들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초기 르네상스 조각가 도나텔로 작품 같다”고 말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때 야수들이란 벽면에 걸려있던 원색적인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을 말한 것이다. 이 화풍은 1905년 이후 3년 정도 유행이 지속된 지극히 짧은 기간으로 설정된다. 이것은 1907년 천재화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명제의 야수파를 능가하는 전위적인 입체파적 그림을 발표함으로 초단기적 유행기를 갖게 된 것이다. 마티스는 1954년 85세로 죽을 때까지 야수파 화가였고 이중섭보다 2년 전에 죽었다.
1972년 3월 서울현대화랑에서 열렸던 이중섭 추모전 도록 글 내용에 평론가 이경성은 “생의 자독과 자학 속에 그의 생을 단축시킨 고독과 빈곤의 예술가 이중섭 예술을 통괄할 적에 거기에는 야수파적 요소와 비극적 요소, 그리고 향토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장을 미학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분석하면, 그 내용이 어설프게 표현돼 있고 특히 이중섭의 그림 형식을 야수파로 분류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환언하면 면밀하지 못한 평론가들에 의해 야수파 화가로 분류되었다. 이중섭의 그림을 야수파로 볼 수 없는 것은 야수파 시대에 살았으나 야수파와는 거리가 먼 그림을 그렸던 루오의 작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루오(1871~1958)의 그림을 결정짓는 기본적 요소는 굵은 평 붓으로 그리려는 대상의 윤곽이나 세부를 검정색으로 대담하게 분할하고, 이 검정색 선에 덧칠을 해 물감이 두껍게 응결되어 거친 마티에르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다. 이 검정선이 루오의 기본조형 원리이다. 1920년대 그려진 검정색 주조의 그림 가운데 ‘율법은 엄하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이다’는 명제의 그림을 보면 유화 붓에 검정유화물감을 올려 크로키 하듯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고, 백색조의 물감으로 검정색으로 분할 된 얼굴 부분을 메꾸어 단숨에 완성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명제로 보아 기독교의 하느님 얼굴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이중섭이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소’의 그림을 관찰해보자. 소가 왼쪽으로 목을 돌려 왼쪽뒷다리 관절부분을 핥아주는 극한적 동세의 장면이다. 위에서 말한 루오의 작품 속에 보이는 얼굴처럼 크로키 하듯 소의 윤곽이 그려지고, 윤곽의 넓은 검정선 사이를 하얀색과 엷은 회색으로 메꾸었다. 또한 소의 어깨 위 왼쪽 상단 공간에 빠른 붓질로 상체의 동세를 강조하고 있는 점도 똑같다. 그가 죽기 1~2년 전쯤 그린 대표작품 흰 소 2점(1954년 홍대박물관·1953년 삼성미술관 소장)과 서울미술관 소장의 황소 1점(1953년)은 그려진 방식이 루오의 기법과 동일하고 또 그림의 크기도 30×50㎝로 같다. 이 소 그림들이 앞서 설명한 루오의 그림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니라고 판단된다. 단지 사람 형상이 소로 바뀐 점 외에는….
화가 이중섭을 천재화가로 일컫는다. 천재화가란 종전의 양식을 시대의 조류에 따라 획기적으로 바꾸어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 내었을 때 붙여주는 명사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중섭을 천재화가로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그가 죽은 후 후기인상파 작가 고흐처럼 수많은 이미테이션이 진품인 양 떠돌았고 특히 은박지 그림은 90% 이상이 가짜라는 것이 통념으로 돼 있다.
그가 산 불우했던 시대의 화가 이중섭이 아닌 서양화가로서 이중섭의 진면목에 대해 새롭고 냉정한 시각으로의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권상인 ㈔부산문화유산연구회 이사장·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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