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낙엽처럼 진다. 떨어지고, 끼이고, 숨막히고 …. 익숙한 형태의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21일 경기 안성 물류창고 신축 공사장에서 5명이 추락해 3명이 숨졌다. 그에 앞서 지난 17~19일 경남 김해·밀양·거제에서도 연일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SPC 계열의 평택 제빵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숨진 지 1주일도 안 돼 6명이 비슷한 참변을 당한 것이다. 산재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9개월이 지났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올해 상반기에만 446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었다. 이 추세라면 연간 사망자가 지난해 규모(828명)를 넘어설 전망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중대재해법 완화를 고집한다. 실로 부조리(不條理)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노동은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죽으려고 하는 노동은 없다. 그런데 현실은 노동이 죽음을 초래한다. 이 기막힌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는 그래서 이런 현실을 “부조리하다”고 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을 주문했다. 실존적 결단이다. “반항하는 인간의 논리는 인간조건의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보태지 않도록 정의에 봉사하고, 세상에 가득한 거짓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명료한 언어를 쓰고, 인간의 고통에 맞서서 행복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고 했다. 1947년 발표한 소설 ‘페스트’에서 연대와 우애를 통해 그 방법을 보여줬다.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도 실존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는 평생 가난과 질병 속에 살았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음악을 쏟아냈다. 지인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쉴새 없이 멜로디가 솟아나왔다고 전한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슈베르트의 밤)라는 친구들과의 예술 모임이 창작에 큰 힘이 됐다. 밤마다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문학과 미술을 토론하며 영감을 얻었다. 친구들과의 교류는 슬픔마저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동력이었다. 그는 1824년 일기에서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세계를 가장 즐겁게 하리라고 생각된다. 슬픔은 이해를 돕게 하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고 썼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를 지친 시민에게 들려주고 싶다. 아르페지오네는 첼로와 비슷한 악기인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듣는 이의 마음 밑바닥을 촉촉히 적시는 첼로의 애잔하고 유려한 선율이 일품이다. 작으나마 위로가 되길 바란다.
이경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