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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석촌 윤용구의 ‘노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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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2-11-06 19:09:00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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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문신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가 수여한 남작 작위를 거부한 선비로서 유명하다. 또한 많은 서화를 남겨 한국미술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서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산수·사군자·화조·괴석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미술사 연구에서 윤용구의 작품을 ‘개성 없는 틀에 박힌 작품’이라 평가절하했지만, 사실 그의 작품만큼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사대문 밖 장위산 자락에 은거해 서화를 즐기며 두문불출했다.

윤용구 ‘노근란’. 개인 소장
윤용구의 작품으로는 대나무 난초 그림이 주를 이룬다. 대나무 그림은 마디를 강하게 그리고, 잎은 창처럼 날렵한 모습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거꾸로 자라는 모습을 그린 ‘도수죽(倒隨竹)’은 나라를 잃은 선비의 모습을 빗대어 그린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난초 그림 중에서는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露根蘭)’이 유명하다. 노근란이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뿌리를 드러낸 모습이 마치 외세의 침략에 힘을 잃고 신음하는 백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옆 작품이 바로 윤용구가 그린 ‘노근란’ 중의 한 점이다. 자세히 보면 허리가 묶여있고, 뿌리는 땅 밖으로 드러나 있다. 난초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러한 모습을 윤용구의 처지와 연결시켜 이해하려 한 것이다. 본래 노근란은 중국의 문인화가 정소남(鄭所南)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정소남은 송나라가 망하자 세상을 등지고 소주(蘇州)에 은거해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 정소남은 묵란을 잘 쳤는데 난초의 뿌리를 땅 위로 드러나게 그렸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묻자 “국토를 남에게 빼앗겼는데, 뿌리를 내릴 곳이 어디 있겠는가” 했다고 한다.

정소남 이후 청나라의 화가 정섭(鄭燮) 등을 거치며 노근란은 난초를 그리는 대표적 양식 중의 하나로 정착했다. 조선에서는 운미(芸楣) 민영익(閔永翊)의 노근란이 유명했다. 민영익은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의 격변기를 거치며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주로 묵화를 그리며 세월을 보냈다. 대나무와 난초를 자주 그렸는데, 특히 노근란을 잘 그렸다. 사람들은 조국을 떠나 사는 민영익의 처지와 연결시켜, 그의 노근란을 ‘조국을 그리워하는 민영익의 마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민영익의 노근란은 서병오(徐丙五) 심인섭(沈寅燮) 김응원(金應元) 등 여러 화가가 계승해 근대기 난초 치는 법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이는 난초의 정신적 의미보다는 미술 기법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소남 민영익의 노근란을 근거로 해, 근대기 노근란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근대기의 노근란은 미술 기법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노근란’을 이야기하며 무작정 ‘항일의식’을 언급하는 것은 근거도 희박하고 합리적인 설명도 되지 않는 서술이기에 삼가야 할 일이다.

황정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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