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한민국 국정 과제는 지방자치 정착과 지역균형발전이다.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열고, 어느 지역에 살든 상관없이 우리 국민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 커다란 숙제로 부여되었다. 지역불균형은 인구 재화 인프라가 집중되는 수도권의 팽창에서 비롯한다.
각종의 대책도 난립한다. 하지만 공권력이 비대해지면 다양성은 훼손되고 지나치게 자율에 맡기면 통일된 대책 수립이 쉽지 않다. 자율(분권)과 지배(중앙)의 무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지배·자율의 호순환은 다원성과 통합성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다.
500여 년 전 라이프니츠는 다원성과 통합성의 균형을 강조했다. 당시 서구의 다원주의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으로 교황권이 쇠퇴하고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는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 대두했다. 다원성은 차이점을 지니면서 유지하는 상태를 뜻한다. 통합성은 복합적이며 층위가 다른 여러 개체 간의 조화 균형을 바탕으로 융합하는 역할을 한다. 다원성과 통합성이 적절히 안배될 때 정치·사회 여러 방면의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다원·포용·통합의 호순환을 보여주는 역사의 무대는 고려시대이다. 다원과 통합의 기조는 인구·신앙·문화·사상의 여러 방면에서 드러났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삼국의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을 흡수한 고려이다. 주민의 구성은 다양했고, 고려에 귀화한 발해·거란·여진·후주·송나라 사람에게도 개방적이었다. 고려 다원사회의 국가체제를 뒷받침한 이념은 일통이다. 일통에는 두 갈래가 있다. 삼한이 하나로 통합되어 주민도 하나라 하는 삼한일통과 천하를 통일한 천자가 등극하여 새 시대를 개창한다는 대일통이 나머지 하나이다.
중앙과 지방 두 공간은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고려의 중앙과 지방은 서로 단절되거나 독자적 공간은 아니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존립을 가능케 한 토대는 사실 군현제이다. 고려는 북쪽의 국경에 접한 지역을 동계·북계라 하고 개경과 주변지역을 경기로 두었다. 고려 당시의 경기는 현재와 같은 위치의 수도권은 아니며, 개경 가까운 지역을 칭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520개 중 130개 군현에만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나머지 390개 군현은 속현이다. 주현을 기준으로 그 아래 여러 속현과 향·부곡·소가 배치된 복합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렇게나 많은 주현·속현을 중앙에서 일일이 통제하기 어려웠다. 통치 효율을 위해 주현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경· 목·도호부를 지역거점으로 삼아 지역 최하부 단위까지 통제가 미치도록 촘촘한 행정망과 인보(주민) 조직을 구축했다.
경·목·도호부의 지역 거점은 광역 중간운영단위로서 계수관이다. 계수관은 경계 내의 으뜸가는 관, 또는 관리를 칭하며 오늘날 광역단체(장) 쯤이다. 계수관에서도 보다 상위인 경(서경·동경·남경)에는 재정기구·상평창·의료시설·학교를 배치했다. 중앙에서는 수도권에 집중된 물화와 각종 혜택을 지방 거점지역에 골고루 나누려는 정책을 구사했다. 지방사회는 국가 운영의 초석이 될 재화를 확보하고 재정 자립도를 갖추었다. 고려 때 지방관아의 세출항목은 중앙정부에 납부하는 물품, 지방 관인의 봉급, 사신 접대비용과 일상적 운영 경비였다. 지방 관아의 주수입원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공해전(현 지방교부금), 자체적으로 경작하는 둔전, 관내 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과 기타 영리수익이다. 지방 관아 자체의 재원 확보를 중앙정부는 공공성을 저해하지 않는 선 안에서 일정 부분 용인해 주었다.
고려의 지역은 중앙차원의 구심과 지방의 원심 간 균형이 잘 맞춰져 운영되었다. 수도와 지방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로움 속에서 국가의 제반 부문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와 지방간 균형이나 다원과 통합의 무게추가 균열될 때 고려는 국가 존립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전 왕조 신라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나, 인종대 분출된 서경천도론은 중앙과 지방의 상호작용이 깨어졌기 때문에 생긴 위기였다. 내홍은 사그라지지 않아 문·무 정권의 교체, 원의 간섭을 받는 시기로까지 이어졌다. 한번 깨어진 균형은 쉽게 복구되기 어려웠다.
지방사회의 생존전략은 인구 쏠림의 해소, 취업기회나 교육인프라의 구축에 있다. 결국 풍성한 먹거리가 지방에도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금융허브의 구축이나 주요 공공기업이 우리 부산에 이전한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미래 세대가 서울로 떠나지 않고 자신의 고장에서 제각각의 역량을 맘껏 펼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려면 장고 끝에 세워지는 대책들이 정권의 입김 따라 물갈이되지 말아야겠다. 한 번쯤 중앙과 지방의 균형, 다원과 통합의 조화를 잘 드러낸 고려의 국가 운영도 되새겨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