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판장(連判狀)은 여러 사람이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해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다. 각자 이름을 적고 도장 또는 지장을 찍는 경우도 있고, 이름만 적기도 한다. 보다 강력한 의사 표현으로 피로써 서명을 대신하는 혈판장도 있다. 각급 기관을 상대로 한 청원이나 대학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대자보도 연판장의 일종이다.
연판장은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의사 표현 방식으로 활용됐다. 조선 말기, 경남 최고 학당으로 민족적 성향이 뚜렷했던 진주의 ‘낙육재’ 학생들은 구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혈서로 연판장을 작성했다. 조선시대 유생들 사이에 왕래하던 글인 ‘유통(儒通)’도 연판장의 한 종류다.
연판장은 대체로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형식상 다수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집단적이다. 내용적으로는 통상 하극상의 성격을 띤다.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어서 종종 논란이 되지만, 기성 체제 혹은 권력자를 향한 항변의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아 여론의 호응을 얻기도 한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맞은 새해 벽두를 달군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권에서 불거진 ‘연판장 소동’이었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이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겨냥해 작성했다. 전당대회에 출마하려는 그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불충(不忠)’했으니 사과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위선’ ‘추방’ ‘정치적 사기’ 등 험악한 말들로 채웠다.
논란이 커진 것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비상식적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 개인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는 지금 권력자인가. 4선 의원을 지냈지만 원외 인사에 불과하다. 더 큰 권력은 오히려 초선 개개인이 쥔 셈이다. 초선 연판장이 개인을 겨냥한 집단 린치로 해석돼 당 안팎의 비판을 받은 이유다. 또 이 연판장에는 국민의힘 초선 63명 중 80%에 달하는 50명이 이름을 올렸다. 부산 울산 경남 초선 16명 중에서도 14명이 서명했다. 내용도 모르고 이름만 빌려줬다는 이가 한 둘이 아니다.
나 전 원내대표가 전당대회에 불출마하면서 연판장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여권 내 누구라도 집단 따돌림, 이지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초선들이 연판장에 ‘묻지 마 서명’을 한 이유는 내년 총선 공천의 담보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을 새긴 이들은 모두 공천을 받을까. 부울경 초선에서만 절반 이상이 교체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이들이 내년에도 ‘충심(忠心)’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태우 서울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