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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매화 앞에서, 슬픔 앞에서

이해인 수녀·시인

  • 이해인 수녀·시인
  •  |   입력 : 2023-02-16 19:08:02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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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자경
매화 앞에서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에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입춘이 지나고 나면 꽃망울을 터뜨리는 2월의 매화 앞에서 봄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와 친하게 지내면서 자주 눈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꽃이 질 무렵엔 한 잎을 띠서 찻잔 위에 띄워 향기를 맡기도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술이 얼마나 섬세하게 아름다운지요.

매화의 꽃말은 고결 충실 인내 맑은 마음이라니 이 또한 귀하게 기억합니다. 얼마 전 8박 9일 동안 ‘생태영성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연피정을 하면서 그간 내내 기계적으로 외우던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 생태계 보전을 위한 기도’도 좀 더 마음을 담아 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사랑의 선물로 주신 이 생태계를 저희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소홀히 하였음을 뉘우칩니다’ ‘오염과 파괴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심을 수 있도록 저희의 삶을 치유시켜주소서’.

바라봄 찬미 아파함 친교 존중 책임 살림 등등 7가지 주제의 영성을 공부하면서 지도신부님이 들려준 체험담에도 공감했습니다. 큰 주제인 지구와 자연을 공부하다 보니 차츰 안목이 넓어지게 되어 어쩌다 겪게 되는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나 오해 같은 일들은 극히 사소하게 여겨지고 괘념치 않게 되더라는 말을 되새기며 저도 마음 넓은 지구민이 되고 싶습니다.



이번 주간은 제가 수녀원에서 식탁의 음식찌꺼기통을 정리하고 많은 행주들을 세탁하는 당번인데 짤순이 기계가 하도 오래되니 작동을 못 해 다시 손으로 짜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변형이 온 몇 개의 손가락들이 생각보다 아파서 우울하던 요즘, 갑자기 접하게 된 튀르키예의 엄청난 재난 소식은 손가락 아픈 건 잊게 만들고 엄청 큰 아픔과 슬픔으로 저를 잠 못 들게 했습니다. 1970년대 필리핀 비간(Vigan)이라는 곳에서 공부할 때 한밤중에 일어난 지진으로 건물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 까지 가는 위험에 미리 ‘죽음’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몇 년전 울산에서 감지된 지진이 부산에도 영향을 주어 한 번은 사무실에서 한 번은 침실에서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옛날 생각이 나면서 ‘지진’이란 단어만 들어도 놀라는 저 자신을 봅니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하루 한 순간을 정말로 마지막인 듯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새롭게 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서만 탯줄이 감긴 채 구조 된 갓난아기, 동생의 머리를 받친 채 돌 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시리아 소녀의 사진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주 오래 전 멕시코의 큰 지진에 흙더미 속에 버티다 숨진 11살의 산체스라는 소녀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녀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던 것처럼 오늘은 7살의 마리암에게 소박한 시 엽서를 적어봅니다.



슬픔 앞에서

- 어린 소녀 마리암에게



36시간의 기다림 끝에 죽음의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온

곱고 애절한 눈빛의 어린 소녀 마리암아

‘저를 구해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게요. 하인이라도 될게요’라는 그 절절한 고백이

생명을 갈망하는 외침으로 오늘도 내 귓전을 맴도는구나

다치거나 잘못될까 봐 여동생 일라프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네 모습에서

가족을 지키는 우애와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본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낸 지극한 인내심이 눈물겨워

나는 멍하니 하늘을 본다.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는 슬픈 일들 앞에서

어떡하면 좋을까 탄식만 하는 내게 너의 눈빛은 무어라도 도움의 일을 시작하라고

나를 재촉하는 것 같구나. 이웃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당히 냉랭하고 무관심하게 대하는 나의 이기적인 차가움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성하게 만들어주는 네게 고맙다, 마리암

땅에는 고운 꽃이 피어나는 이 봄엔 우리 모두 슬픔이 하는 말을 잘 들어야겠구나

극적으로 구조된 네 가족과 같이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주렴



슬픔 앞에서도 담대하고 의연하게 길을 가며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는 마리암이 되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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