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가 고향인 대학 동기생은 30년 전 부산에 ‘유학’ 왔다가 정착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는 가장 혹독하다. 어렵사리 묶어뒀던 수도권 규제를 MB가 대폭 풀어버렸고 이것이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이 수도권으로 쏠리는 기폭제가 됐다는 게 그의 분노다. 외지인이던 그가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부산은 민주화의 성지라는 자부심과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타 시·도 사람들이 막연히 두려움마저 느꼈지만, 지금은 그저 쇠락해가는 도시일 뿐이라고 푸념한다.
고속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몰고 평택이나 용인만 진입해도 거기서부터가 그냥 거대한 서울이다. 반도체 클러스터 핵심인 삼성전자를 비롯해 LG전자 현대모비스 등 굴지의 대기업과 부설 연구소, 외국기업이 즐비하다. 줄줄이 이어진 제약회사에선 일손을 못 구해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월 300만~400만 원짜리 취업이 어렵지 않다. 부산이 인구 400만 명 목전에서 300만 명 대로 주저앉는 사이 평택은 40만 명에서 60만 명대로 늘었고, 용인은 11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뒀다.
윤석열 정부가 드라이브를 거는 2차 공공기관 이전 대상 중 가장 뜨거운 이슈는 산업은행이다. 한국은행과 함께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국책은행이라는 위상을 감안하면 이전에 따른 파급 효과는 대기업 이상이다. 상반기 중 이전기관으로 고시하고 올해 안에 계획을 마무리한다는 게 정부 구상이었다. 1차 공공기관 이전이 계획에만 4년 걸렸으니 지금 서둘러야 임기 내 완료라는 대통령 공약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 그런데 산은 이전을 위한 법 개정 작업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주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강석훈 산은 회장을 다그쳤다. 산은이 일부 부서를 부산으로 옮기는 조직 개편을 추진하자 입법권 침해라고 반발하면서다. 얼핏 절차적 정당성을 따지는 것처럼 보인다. 산은법에 명시된 ‘본점을 서울시에 둔다’는 문구를 고치기 위해 발의된 개정안은 3개다. 그중엔 민주당 의원 발의안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가 보류 결정을 내린 후 법 개정 작업은 석달째 멈춤 상태다. 입법 절차의 첫 단계조차 진행시키지 않으면서 개정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하는 게 민주당이다. 김 의원은 “알아서 하라. 우리는 입법 사법적 대응에 나설 테니 각자 가진 권한을 충분히 행사해 보자”고까지 했다. 협조 안 하겠다는 뜻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산은 노조 주최 집회에 참석해 마이크까지 잡는다. 그 중 한 사람이 김민석 의원이다. 서울 영등포가 지역구인 김 의원은 대표적 산은 이전 반대론자다. 그러면서 여의도 입주기업 세제 혜택 법안을 별도 발의했다.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던 10여년 전 부산시장 출마를 선언하고 ‘서울을 이기자’ 외치던 모습이 생생한데 말이다. 답답하기는 부산 민주당 의원들이 더하다. 박재호 의원은 상임위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무슨 의견을 냈는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압도하는 분위기에 국민의힘 의원들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하다.
국회 정무위 24명 중 위원장을 포함해 민주당이 14명이다. 민주당 찬성 없이는 개정법안이 본회의는커녕 상임위조차 통과할 수 없는 구조다. 민주당의 반대에는 뚜렷한 논리가 없다. ‘노조가 반대한다,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수준이다. 생활 근거지가 달라질 게 뻔한 노조야 반대가 당연하다. 직원 입장을 100% 들어주면 산은은 서울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민주당은 민생법안 처리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재명 대표가 취임한 이후 단 하루도 쉼 없이 국회를 열어 놓으면서 이런 문제는 논의조차 않는다. 민주당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거시(유산)를 자신들이 스스로 짓밟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20년 전 쏘아 올린 균형발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이후 처음으로 국가 개발 패러다임을 바꾼 정책이었다. 이전까지 인구 순유출은 늘 수도권 방향이었지만 참여정부의 강력한 분권 정책 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한때나마 그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민주당은 국토 균형발전이 누구도 아닌 자체 대표 브랜드였음을 잊었음이 분명하다. 수도권 이익만 대변하는, 보수 진보를 막론한 중앙 언론의 논조에 순치된 측면도 있을 것이고 자신들의 표밭처럼 된 수도권 주민의 표심을 의식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균형발전이라는 대의에 눈 감는다면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다가 도시 부자와 엘리트의 정당으로 변질된 미국 민주당처럼 정체성 상실이라는 위기에 한순간 봉착하게 될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