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이 100% 안전하지 않다면 더 이상 짓지 말아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의 격납용기를 설계했던 고토 마사시 씨의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뒤 얼마 되지 않아 부산을 찾은 그가 강연 중에 한 발언이다. “원전은 절대 안 돼”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100% 안전’이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빈틈없이 대비해도 환경과 시간이란 변수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게 인간사 아닌가. 재앙이 된 후쿠시마 원전을 건설한 핵심 참여자로서 뼈아픈 자기 고백이기도 했을 터였다.
지옥으로 바뀐 사고 현장에서 그는 원전이 가진 태생적인 악마성을 처절하게 확인했으리라. 원전의 악마성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폭발사고에서 봤듯 가공할만한 파괴력도 그렇지만, 그 후유증이 영구하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원자로에서 핵분열을 일으키는 방사능물질 플루토늄-239는 반감기만도 4만3000년이고 수십만 년을 격리 보관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불과 1만 년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인간의 기준으로는 무한의 시간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는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수습되지 않고 있다. 천문학적인 복구 비용을 들였는데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폭발한 원자로를 식힌 오염수를 더는 가둘 곳이 없어 바다로 방류한다고 한다. 다핵종제거 시설을 가동했다지만 삼중수소와 일부 핵종이 잔류한 오염수다. 오염수가 바다에 풀리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해양생태계와 연결된 인간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다로 쏟아붓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난 게 1986년이니 40년이 다 되어간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광범위한 지역이 불모의 땅이 되었다. 문제는 폭발한 원자로를 묻은 거대한 콘크리트 석관 속에서 죽음의 사신이 꿈틀댄다는 데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 스며들어, 언제 방사능이 새어 나와 인간의 마을을 덮칠지 모른다.
인간의 삶터를 짓이긴 원전 사고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회복할 수 없는 비극적 참사로 이어간다. 자칫 핵 재앙을 미래세대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판이다. 치명적 사고 없이 수명을 다한 원자로가 폐로에 이르더라도, 남은 핵폐기물 역시 지금의 과학으로는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 인류가 원전을 가동한 지 70년이 됐으나 사용후핵연료 등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는 속수무책인 상태다. 핀란드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설 중인 심층저장 처리시설을 모델 삼아 각국이 핵폐기물 처리시설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10만 년 이상 견딜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는 일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국내도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문제로 몸살을 앓는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핵폐기처리장 없이 임시저장으로 버텨 왔다. 사용후핵연료다발 등 고준위 핵폐기물은 해마다 700t 이상 원전 내 수조에 보관하고 있으나 한계에 이르렀다. 고리원전과 한빛원전은 2031년, 한울원전은 2032년에 포화 상태가 된다. 한수원은 지난달 이사회를 열고 고리 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시설 건설 기본계획안을 의결했다. 출구는 꽉 막혔는데 입구로 꾸역꾸역 퍼넣는 것과 진배없다. 뾰족한 대책조차 없이 원전을 확대하는 데에만 목을 매는 정책에서 광기마저 느껴진다.
지난달 21일 부산 시청광장에서 140개 시민단체가 모여 고리2호기 수명연장·핵폐기장 반대 범시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 시민단체와 풀뿌리 자치단체, 생활단체까지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넘어서 손을 맞잡았다. 낡은 원전의 연장을 막고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의 일방적 추진에 맞서 한목소리를 냈다. 불안한 원전을 머리맡에 이고 사는 부산 울산 경남 800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한수원은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관련해 설계수명이 과학적 기술적 문제가 아니리고 강변하면서, 노후 원전의 열화 요인 때문에 설계수명을 만든 취지는 아예 외면한다. 고리2호기는 지난 40년간 숱한 고장과 가동정지 등 사고가 잇따랐다. 일부는 심각한 사고로 시민을 불안케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낡은 원전을 경제성 운운하면서 수명을 연장한 것은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독단일 뿐이다. 한수원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추진은 고리3, 4호기의 수명연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영구폐기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사고 있다.
더욱이 주민의 생존권적 안전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를 한수원과 정부는 충분한 숙의도 없이, 주민의 의견수렴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상시적 위험에 시달려야 할 시민으로서는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기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다. 범시민운동본부는 대시민 홍보를 통해 시민 3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지자체나 지역의 정치권은 무관심하기 그지없다. 탈핵을 적폐로 삼아 친원전으로 선회한 윤석열 정부의 눈치를 보는지 부산시와 시의회, 지역의 국회의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일방적이고도 무모한 원전 확장 정책의 강행에 맞선 시민의 절박한 목소리에 부산시나 부산의 정치권이 답을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