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년 전 오늘(2022년 3월 10일) 새벽 4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국회에 마련된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선거 개표상황실’을 찾았다. 당시 TV 중계화면에 비친 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아마도 역대 최소인 0.73% 차이의 박빙 승리를 나름 의식했던 것 같다. 그의 당선이 확정된 시각은 개표율이 95%에 육박하던 그날 오전 3시20분께. 당사자로선 그만큼 피를 말리며 개표를 지켜봤을 법하다. 그래서였을까. 상황실 TV 중계카메라 앞에 서서 당선 소감을 밝히는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진정성이 느껴졌다. 준비된 메시지에선 느낄 순 없는, 현장에서 길어 올린 말이 지닌 그 투박함 덕분인 듯했다. 이어 여의도 당사 앞 특설무대에서의 즉석 감사 인사도 차분했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힘든 선거과정을 거치며 깨달은 그만의 진심이 묻어난 탓이었다.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선거운동 할 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1년. 대통령은 그날 언급한 초심을 잘 지키고 있을까.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당선소감에서 첫째로 호출된 이는 “멋지게 뛰어준 우리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였다.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상대에 대한 의례적 덕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냥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의회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치하면서 국민을 잘 모시도록 하겠다.” 사실 압도적인 ‘여소야대’ 국면에서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때문에 내키진 않더라도 ‘야당 껴안기’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다.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른바 ‘시행령 통치’로 야당이 장악한 국회를 그냥 ‘패싱’했다. 모법인 정부조직법의 위임을 벗어났다는 지적에도 아랑곳 않고 시행령을 개정해 행정안전부에 경찰국을 신설했다. 법무부 역시 일명 ‘검수완박법’의 취지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시행령을 만들어 사실상 검찰 수사권을 원상회복시켰다. 두 사안 모두 헌법재판소가 위헌 여부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선공약인 여성가족부 폐지가 정부조직법 개정을 반대한 민주당에 막힌 게 대표적이다. 자신의 통치철학이 반영된 정책의 입법은 절대과반 의석을 가진 야당을 설득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여전히 야당과 대화할 마음이 없는 듯 보인다. 정부 출범 이후 제1야당 대표와 그 흔한 밥자리 한번 가지지 않았다. 대신 검찰 수사권을 동원한 전방위적 차원의 압박으로 야당에 ‘항복’만 요구 중이다.
이 와중에 진영 간 대립과 갈등은 커질 대로 커졌다. 벌써 수개월째, 매 주말 서울 도심에선 ‘내전’ 상황을 방불케 하는 시위 세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통합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던 약속은 당연히 공염불이 돼 버렸다. 더 큰 문제는 통합의 전제로 내건 다짐조차 심하게 망가졌다는 점이다. “지역 진영 계층 이런 것을 따질 것 없이, 모든 국민이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그의 말과는 완전 딴판으로, 검사들만 대우받는 나라가 돼 버렸다.
실제 권력핵심을 온통 검찰출신으로 채운데 이어 금융감독 수장마저 검사를 발탁했다. 비판이 빗발치자 대통령은 “필요하면 또 (검찰출신 인사) 하겠다”고 어깃장까지 놓았다. 그런데 이 말은 지켰다. 경찰 수사사령탑으로 버젓이 전직 검사를 임명한 것. 그것도 학교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자기 새끼만 살려보겠다고 ‘끝장소송’까지 벌여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를 했던 사람을 말이다. 분노한 민심에 놀라 하루 만에 결정을 번복하긴 했다. 하지만 ‘검사 편애’를 고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번엔 국민연금 요직에 검사 출신을 앉혔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따가운 질책엔 아예 귀를 막기로 한 모양이다.
이 장면에서 대통령 당선소감의 또 다른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나라의 리더가 되기 위해 국민의 목소리를 어떻게 경청해야 하는지를 (선거를 통해) 배웠다.” 사실 ‘경청’ 다짐은 집권 초반 적잖은 점수를 땄었다. 어느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출근길 문답’은 정말 신선했다. 국민과의 적극적 소통의 자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대통령은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 자신이 하고픈 말만 쏟아내기 시작했다. 경청이 사라진 일방통행식 소통이었다.
그조차도 미국 순방길에 자기가 내뱉은 “바이든” 또는 “날리면”을 둘러싼 불편한 질문을 이유로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이후 대통령실은 질문 없이 만들어진 ‘대통령의 어록’만 공개하고 있다. 이밖에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국격”을 천명했던 말은 “최악의 굴욕외교” 비판에 직면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 배상금 해법으로 물 건너가버렸다. “(여당의) 성숙된 정당” 다짐 또한 ‘윤심’ 개입으로 엉망이 된 전당대회로 식언이 돼 버렸다. 그러나 대통령 생각은 전혀 다른 듯하다. 그제(3월8일) 전당대회 축사에서 지난 1년을 자평하면서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사실상 ‘마이 웨이’를 계속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셋째는 뒷심이다. 초심을 잃고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뒷심도 말짱 도루묵이다. 초심을 잊은 대통령이 걱정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