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소설 ‘25시’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오르규가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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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백련의 ‘산수’. 1976년 의재미술관 소장 |
한국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명사를 만나고 싶어 하여, 당시 한국의 대표적 화가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의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을 방문했다. 그때 게오르규는 허백련에게 “난초는 동양인의 마음과 같다는데, 대하기 까다롭다는 뜻인지요?”라 물었다. 허백련은 이에 “아니지요. 조용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허백련은 화가이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도인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새로운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어 했다. 집안에서는 미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법학 공부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가야만 했다.
허백련은 일본 남화의 거두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 일본 화단은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일본화 화풍이 휩쓸고 있었다. 과거의 전통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서구 원근법과 수채화법을 받아들인 새로운 화법이었다. 허백련 또한 신남화를 습득하기에 바빴다. 한국에 돌아온 허백련은 일본에서 배운 화법으로 한국 화단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서 배운 화법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스스로의 예술 세계를 되돌아보았다. 과연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법이 옳은 것인가’라는 화두에 빠졌다. 그는 일본에 가기 전에 김정희 허련 허형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남종화를 배웠었다. 유행을 따라 일본에서 새로운 화법을 공부했으나, 새로이 배운 화법이 이상적인 화법이 아님을 깨닫는다.
허백련은 이때부터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그림을 찾는다. 결국 그가 찾은 길은 자기 몸에 깊숙이 배어 있는 조선조 전통에 현대의 미감을 담는 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학습할 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새 길을 모색한다. 일본 신남화가 추구한 세련되고 감각적인 화풍을 버리고 무던하면서도 순수한 조선 화법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그는 이러한 화법을 ‘작대기 산수’라는 말로 표현했다. 곧 겉멋 들지 않은 산수화, 잔재주에 얽매이지 않는 대범한 산수화를 그리고자 했다.
이후 허백련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동안 일본에 유학한 화가들에 의해 유행한 세부 묘사에 치중한 감각적인 산수화를 버리고 대범하게 산세를 표현한 기법을 되찾은 것이다.
실제 허백련의 그림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화보에 따른 중국풍의 그림이나 일본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렸으며 화조화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또한 서예에서도 선이 굵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 썼다. 이러한 허백련의 모습은 당시 한국의 전통을 보여주는 선비 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한 명의 화가였다기보다는 한국적 정서를 담은 ‘한국의 양심’ 같은 존재였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화풍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인격적인 면에서 아름다운 모습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과학 문명이 힘을 얻어가는 현실에서 정신성의 고귀함을 일깨워주었던 허백련의 삶이 더욱 그리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