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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씁쓸한 ‘거지방’ 유행

  • 이은정 기자 ejlee@kookje.co.kr
  •  |   입력 : 2023-04-19 19:57:30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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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루이뷔통 샤넬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지난해 국내에서 사상 최대 매출을 거뒀다. 3대 명품 브랜드가 올린 매출만 4조 원에 육박한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해 보복소비가 증가한 영향이 크다. 고물가·고금리 여파에도 지난해 백화점에선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가 구매하는 명품 오픈런이 이어졌다. 명품 주 소비층은 자신만의 개성을 남과 다른 패션으로 나타내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들이었다. 수입차 시장에서도 2030세대의 구매 파워가 컸다. 먼 미래보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욜로 열풍과 자신의 소비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플렉스 문화도 한몫했다.

올들어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생활물가가 급등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인 ‘거지방’이 한 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200개 이상 운영된다. 최대한 절약해서 거지처럼 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방에는 절약 구두쇠 아끼기 등 키워드를 해시태그로 걸어놓고 있다. 채팅방 대부분은 이름 얼굴 등을 알 수 없는 익명을 조건으로 참가자를 받는다. 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참가자들이 소비 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이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참가자들이 채팅방에 자신의 소비 패턴을 올리면 바로 다른 사람이 피드백을 한다. 과소비나 충동구매, 불필요한 구매를 꾸짖는 식이다. 퇴근 후 시원한 생맥주 5000원 지출 예정이라고 하면 “물 드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의견에 “회사 탕비실에서 공짜로 마시라”고 단호하게 꾸중한다.

이들은 나만 주머니 사정이 나쁜 게 아니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타인에게 소비 내역을 공유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절약 정신이 생긴다고 한다. 생활비 아끼는 방법도 서로 나눈다. 카드나 통신사 포인트 활용법, 무료로 즐길 이벤트 등도 단골 메뉴다. 해학적인 피드백이 재미있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사례가 많다. 거지방이 젊은층의 놀이공간이 되는 셈이다.

거지방 유행은 빚투, 영끌로 힘들게 살고 있는 2030세대가 커피·담뱃값이라도 아끼며 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한국보건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전체 2030세대 가구주 10명 중 2명이 소득보다 빚이 3배 이상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청년층의 절약 열풍이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내다본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사소한 소비조차 줄여야 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이 씁쓸하다.

이은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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