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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과거사에 대한 침묵 이후 생길 수 있는 일들

日 교과서 식민지배 왜곡, 독도침탈 야욕도 노골화

가해자 반성·사과 있어야 한일 진정한 동반자 가능

홍순권 동아대 명예교수

  • 홍순권 동아대 명예교수
  •  |   입력 : 2023-05-17 19:59:07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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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뒷날 일의 스승으로 삼으라는 중국 고사의 명구가 수년 전 중국 난징을 방문했을 때 남경대학살기념관의 출구 큰 벽에 내걸린 것을 본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올해 들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여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피해 보상 문제와 관련해 제3자 변제안을 공식 발표하여 정치권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더니, 이달 7일 서울에서 열린 일본 기시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과거사 정리 없인 미래를 위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발언을 해 다시 한번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일제강점기 과거사 문제만 덮으면 양국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동맹 수준으로까지 회복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윤 정부의 이러한 과거사 인식은 국내 학계를 포함해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접해온 국민 다수의 인식과 크게 상충하는 것이어서 마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한일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양국 정부 간 수준에서 첫 설전을 벌인 것은 1953년 한일회담에서다. 당시 일본 대표 구보다 간이치로는 조선 식민통치는 일본이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언을 했는데, 이후 오랫동안 일본의 한국에 대한 과거사 인식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한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에 첫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93년 8월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의 담화였다. 이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동원 과정에서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어서 1995년 8월에는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러한 흐름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이어져 동아시아 과거사 청산과 한일관계에 있어서 발전적 전망을 낳기도 했다.

이처럼 1990년대 들어서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일본 내의 정국 변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부적 영향이 적지 않았다.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한국에서는 ‘정대협’을 위시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 동아시아 과거사 청산운동에 참가한 활동가와 연구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 활동에도 주목하여 유엔에서 관련 인권 보고서를 채택케 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급기야 2000년에는 도쿄에서 민간 법정인 여성국제법정을 열어 일본군의 반인도적 범죄 행위를 단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과는 정반대로 1997년 일본 우익이 만든 이른바 ‘새역모’(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등장하면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점차 퇴행적으로 바뀌어 갔다.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류의 일본 자유주의 사관과 역사수정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퇴행적 흐름에 맞춰 일본 정부의 인식을 대변하는 역사교과서 서술 또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침략전쟁 등에 관한 내용이 축소 왜곡되거나 삭제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 갔다. 이 와중에 2년 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가 일본의 침략전쟁 시기 조선 여성의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교수의 타이틀도 함께 지닌 그의 논문은 오늘날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때문에 국내 학계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이 논문의 철회를 요구하는 국제적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 과정에서 동원된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성과 범죄 행위를 삭제하고 나면 일제의 전쟁 행위는 어떻게 기억되고 기술될까. 아마도 일본의 침략전쟁은 다시 대동아 전쟁이나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미화될 것이며, 일제 식민통치는 일본이 조선에 베푼 은혜로 기술될 것이고 독도의 영유권 주장 또한 강화될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현재 일본 국방백서나 역사교과서 서술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과거사의 진실을 밝혀 새로운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 맥락이 전혀 다르다. 과거사를 청산하는 진정한 목적은 잘못된 과거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전혀 변화가 없는 마당에 우리만 일방적으로 과거사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저들은 오히려 조선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군국주의의 영광을 추억하며 이를 현실로 소환하고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할 것이다. 전범자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일본 각료들의 참배 행렬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미래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고 하는 남미 인디언의 속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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