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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도청도설] 부재중전화 스토킹

  • 강필희 기자 flute@kookje.co.kr
  •  |   입력 : 2023-05-31 19:42:22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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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가 여성 조교에게 신체 접촉을 강요하고 음흉한 농담을 일삼다 법의 심판대에 오른 일명 ‘서울대 신 교수 사건(1992년)’은 우리 사회가 처음으로 성희롱을 객관화해서 보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남성의 이런 언행은 친밀감이나 관심의 표현 쯤으로 사실상 묵인됐다. 심지어 여성을 향한 유혹적 행동을 이성에 대한 예의로 착각하는 황당한 인식도 남아 있었다. 당시엔 ‘성희롱’이라는 단어조차 없어 영어에서 따온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 대신 쓰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 피해자 변호인이 부하 여직원 성추행 혐의를 쓰고 자살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다.

2018년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대법원 판결문에 등장했다.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이다. 성범죄 가해 남성이 아닌 피해 여성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의미다.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우선으로 하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이 21세기가 한참 지나 성범죄 재판에서 새삼스레 확인된 것이다. 이 판결문은 요즘 ‘대장동 50억 클럽’ 멤버로 주목받는 권순일 전 대법관이 썼다.

상대방 전화에 부재중전화를 반복적으로 남기는 행위가 스토킹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뒤늦게 나왔다. 가해 남성은 전 여자친구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차단하자 9차례 메시지를 보내고 29차례 전화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문자와 전화 모두 스토킹이라고 인정했으나, 2심은 부재중전화 기록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부재중전화 표시는 휴대전화 기능일뿐 말이나 음향이 피해자에게 직접 도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바로잡긴 했으나 많은 여성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맥락을 배제한 채 법조문의 기계적 적용에 그친 항소심 논리에 아연했다.

모르는 남성의 집요한 시선만으로 상당수 여성은 당혹감이나 불쾌감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낀다.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는데도 계속 울려대는 전화기는 훨씬 더 공포스럽다. 피해 여성의 심적 기제에 대한 공감력이 일반 남성뿐만 아니라 중장년 남성이 주류인 사법부마저 현저히 떨어질 때가 종종 있다. 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는 남성의 혀를 잘랐다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쓴 여성이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때 인정받지 못한 정당방위를 지금 1, 2심도 기각했다. 상식이 그야말로 상식이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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