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화가 철마(鐵馬) 김중현(金重鉉, 1901~1953)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어린 시절 집안 사정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고, 그에 따라 하고 싶은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중현은 스스로 노력해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온 화가들 못지않은 활동을 보인다. 게다가 다른 화가들은 동양화 서양화 중 어느 한 분야에서만 활동했지만 그는 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미술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불우한 처지가 오히려 독학의 힘을 강하게 해, 서로 다른 두 장르를 넘나들며 능력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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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현 ‘비 온 뒤 영도에서’. 개인 소장 |
김중현은 서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중학교 과정을 겨우 마쳤다. 상급 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전차 차장과 점원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1925년께부터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해 도안을 하거나 포스터를 그리며 지냈다. 회사를 다니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이루지 못한 화가의 꿈을 키운다. 1939년에 마침 체신국에 다니던 친구 전수남이 세상을 떠나자, 대신 자리를 이어받아 감리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여기서도 주로 도안 등 미술 관련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근무 조건이 좋았던 체신국에 다닌다는 것은 요즘 말로 정식 공무원으로 취직한 것과 같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그의 화가로서의 작업 환경이 급속히 좋아진다.
김중현은 사직동에 살며 근처에 사는 구본웅 김복진 이승만 등 일본 미술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친구들과 어울리며 실력을 키웠다. 다행히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를 출품해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면서 미술계에서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초기에는 소박한 기법의 자연 풍경과 정물, 인물화 등을 그렸다. 점차 입상을 거듭하며 서민 계층의 삶과 풍속적인 정경을 주제로 한 토속적 표현으로 독자성을 드러내었다.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동, 서양화 부분에서 모두 특선을 해 미술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문화원 서울신문사 등에 다니며, 다양한 일을 하면서 화가 활동을 계속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 영도에 정착, 도자기 공장에 나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생활한다.
전쟁 중에도 김중현은 그림 그리는 것을 놓지 않았는데, 이때 그린 수채화 ‘비 온 뒤 영도에서(雨後影島에서)’가 전한다. 이 그림은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5월의 영도 풍경을 그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두 달 전, 김중현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피난처라 주변 환경이 쇠락해 볼품이 없다. 하늘과 땅의 채색 대비나 공간 대비 등의 필치가 유연해 오히려 서러워 보인다. 멀리 보이는 큰 건물은 웅장해 보이나, 가까이 보이는 주변은 전쟁 상황의 어려움을 보여주듯 을씨년스럽다. 언덕 위 공터에 엄마인지 누이인지 모를 한 여성이 아이를 업고, 또 한 어린 아이를 옆에 데리고 서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면서, 전쟁의 후유증을 보여주는 쓸쓸한 면도 있다. 그래도 저 멀리 하늘의 푸른빛은 언젠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희망처럼 보여 현실의 어려움을 달래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