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엔 숱한 이야기가 쌓여있다. 어떤 사람은 현무암처럼 숭숭 뚫린 이야기를, 어떤 사람은 몽돌을 훑는 물소리 같은 이야기를 걸어왔다. 이야기의 심지는 사람이다. 호롱불의 심지를 들어 올리며 가릉가릉 불꽃을 밝히듯 사람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 그의 심지가 된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과 아직도 모르는 오솔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내일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신비로운 것은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거울처럼 비춰주는 어깨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설령 절절한 고통에 직면하더라도 선암사 해우소 등 굽은 소나무처럼 내 이야기를 그냥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기에,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한 시간을 지나 저마다의 빛깔로 물드는 시절이다. 방방곡곡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담은 사진이 다채로운 사연을 담아 수북하게 쌓여간다. 저마다의 사연처럼 모든 경험은 이유가 있다. 아픔은 아픔대로 이유가 있고 즐거움은 또 그만큼의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을 들어주는 마음이 배려이다. 때로는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외로운 영혼을 치유받기도 한다.
배려의 시작은 공경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도 그런 공경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공경은 공감으로 이어가고 상호신뢰로 단단하게 엮이어 마침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그것은 화려한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 상대를 헤아려 건네는 말 한마디, 말없이 토닥여 주는 온기, 때로 그냥 한 번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너와 나는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우리나라를 넘어 서구 철학자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실천하는 지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이야기는 회자되어 널리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정치적 격동기를 살다 간 대유학자로 일정한 스승이 없이 가학(家學) 속에서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세(勢)·명(名)·리(利)를 획득하기 위해 온갖 협잡과 술수가 난무하던 세태와, 인심이 바로잡히지 못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한편, 타인을 예로 대함으로써 인간을 존중했으며 일상의 삶 속에서 ‘경(敬)’을 실천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계를 중시했던 오백 년 전 실천적 지성인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
아! 그를 생각하며 ‘지금’을 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본 것만을 말하고 그것만이 진리인 양 여긴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만 정의로운 세상이다. 사람에 대한 공경은커녕 같은 방향 아니면 적이 되는 사회, 귀는 있으되 경청하는 기능이 상실되었으며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다. 전인교육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열어가는 교권은 추락했으며, 노년은 존경받지 못하고 청년은 미래가 불안하다. 시대정신은 사라지고 칼춤이 난무하는 사회, 법치도 염치도 협치도 없는 광기의 정치판엔 미래 언어가 없다. 기후위기와 생태, 환경의 위기는 생존권에 경고를 보내고 있지만,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국회 입법자들의 목소리는 없다. 그뿐이랴. 문화의 원형은 고사 위기에 직면해 있고 오로지 패권주의만 있다. 한 국가의 브랜드파워는 경제뿐 아니라 문화의 역할도 크다. 문화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양식과 세계관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양상이다. 삶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시대의 특수성에 의해 형성된 문화는 경작되는 농작물처럼 다양한 현상으로 성장한다.
문화양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이야기가 된다. 곁방문을 돌아 실개천으로 흐르는 이야기는 위대한 예술이 되고 그것은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된다. 예술의 향유 속에 형성된 상상력은 미래 세대가 열어갈 세계의 초석 아닌가.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작은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문화 관련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러갈 이야기 하나를 잃어버린 아찔함이 일어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강한 것은 부러진다. 강한 것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 태풍에 뿌리째 뽑히는 굵은 나무와 달리 을숙도 갈대, 제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은 강해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끌어주기 때문이다. 어떤 위기 앞에서 분열하지 않고 이마를 맞대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자라난 갈대숲이 무질서한 듯해도 들여다보면 나름의 질서를 가진다. 키 큰 것은 낮은 데까지 햇빛이 들도록 가지를 좁히고 때로 여린 넝쿨에 등을 내어준다. 천적을 피해 숨어든 생명은 어미처럼 보듬어 주며 시간의 이행이 그려낸 숱한 이야기를 품는다. 숱한 사연을 담아낸 을숙도 갈숲이 전한다. 이야기가 끊어진 사회는 죽은 사회와 같다고…. 붉은 포도주를 짜기에 아직 가을이 많이 남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