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 9일 YH무역 폐업에 분노한 여공(女工)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들의 요구는 “일자리를 지켜달라”. 김영삼(YS) 총재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사였다. 경찰이 야음을 틈 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기 때문. 새벽녘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한 채 발견됐다. 경찰은 김경숙이 신민당사에서 스스로 투신했다고 주장했으나 ‘진실’은 달랐다. “경찰 폭력에 저항하며 달아나다가 추락했다”가 팩트(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다. 박정희 정권은 YH무역 사건 직후 눈엣가시였던 YS를 국회의원에서 제명했다. 부산·경남이 들끓었다. 부마민주항쟁이다. 계엄령 선포와 위수령 발동으로 시위는 진정됐지만 ‘10·26’으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시해 사건 수사는 신군부 리더 전두환이 맡았다. 전두환은 여러 혐의를 씌워 자신을 견제하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전격 체포했다. 12·12 군사반란의 서막이다. 군·정을 장악한 신군부는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재야 지도자 김대중(DJ)도 잡아들였다. ‘빛고을’ 광주는 가장 앞장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계엄군 총칼에 무릎 꿇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다. 1987년 6월 항쟁도 전두환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 국내 4대 민주화운동 중 3개가 12·12 사태와 연관된 셈이다.
12·12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7일 만에 관객 230만 명을 돌파했다. 관람평이 재미있다. “배우들 열연에 몰입감 끝내줬다” “N차 관람한다”는 호평부터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화가 난다”는 후기도 눈에 띈다. ‘서울의 봄’을 보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휴대전화 건강관리 앱으로 측정해 SNS에 올리는 ‘인증 챌린지’도 유행 중이다. 관객들은 전두환을 제어 못한 최규하 정부의 무기력함에 특히 분노하는 것 같다. “역사를 바꿀 수 없어 안타깝다” “동료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는 아프리카에만 있는 줄 알았다”는 댓글도 보인다.
YS 정부의 공보처 장관 오인환은 저서 ‘김영삼 재평가’에서 12·12반란의 교훈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박정희의 하나회(신군부의 사조직) 양성은 큰 과오였다. 소심하고 나약한 국가 지도자는 나라의 재앙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12·12의 본질과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다.”
현재 세대가 12·12와 국정 리더십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은 오인환의 걱정 몇 개는 덜어준 것 같다.
이노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