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읽기와 숭배하기

흥미 유발하는 글·영상…논리적 검증 않는다면 그 뒤에 숨은 누군가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 것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  |   입력 : 2023-12-20 19:31:28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니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필자가 하는 일은 주로 읽고 쓰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무엇을 읽었고 무슨 글을 썼는지 묻는다.

읽기라는 주제에 관해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데, 히브리 성서 또는 ‘토라’를 읽고 필사하는 행위에 관해 논의한다. 유대 랍비들은 토라를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들을 서기들(쏘프림)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토라의 글자들을 모두 세었기(쏘프림)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브리로 ‘세다’라는 말이 ‘서기’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토라를 쓴 사람들은 글자 수를 정확하게 세어 가며 본문을 정확하게 필사했는지 확인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라를 구성하고 있는 글자 전체에서 한 가운데 있는 글자, 한 가운데 있는 낱말, 한 가운데 있는 구절이 무엇인지 알려준다.(바벨 탈무드, 키두쉰 30 앞면)

아직 인쇄술이 발전하지 않았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 책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놓고 손으로 필사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낱말을 뛰어넘으며 쓰거나 같은 글자가 나오는 다른 줄을 베끼는 등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토라를 읽고 쓸 때 글자 수를 일일이 세어 정확한 본문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기들의 작업은 읽기와 쓰기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보통 책을 읽는 행위와 비교할 때 그 목적이 사뭇 다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글로 표현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내 생각에 비추어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나 서기들이 필사를 할 때 이런 사고행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기계적으로 글자를 옮겨 적고 수를 세어 자기 작업을 검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서기들의 읽기는 읽기가 아니며 특정한 다른 목적을 위한 전문적인 노동이 된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때 요쎕 랍비라는 사람이 나서서 ‘한 가운데’ 지점에 관한 전통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논란을 일으킨다. 그의 질문을 들은 다른 랍비들의 대답이 더 흥미로운데, 고민할 필요 없이 토라를 가져다가 글자 수를 한번 세어 보자고 말한다. 매우 실제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요쎕 랍비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지적한다. 그 옛날의 서기들은 ‘모자란 것과 남는 것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처럼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토라의 원본이 어떤 형태였는지 고대 서기들은 잘 알고 있었고 글자 수도 셀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처럼 토라 원본에 관한 지식이 없으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토라 사본을 세어도 그들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말은 이미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이 토라의 원본과 사본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랍비 유대교 안에서 토라 본문은 신의 말씀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이 말씀을 기록한 글자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손을 통해 종이나 양피지 위에 기록되었음을 인정했고 결국 탈무드 시대 랍비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소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기서 글자와 글이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특정한 종교와 전통이 가지는 권위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토라에 기록된 글자가 수단에 불과하다면 처음부터 수를 셀 필요도 없고 글자 수를 세는 작업을 위해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랍비들 사이에서 토라는 이미 한 종교의 성물이 되었고, 이 성물과 관련된 전통(숫자 세기)은 신의 말씀으로 존중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미 수립된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책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읽기의 대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다.

랍비들의 논의를 낯선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을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든지 언제나 이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 책을 통해 또는 컴퓨터나 전화기를 통해 수많은 글자를 대하는 당신은 그 글자들을 읽는가? 아니면 숭배하는가? 요즘은 문자매체보다 동영상을 더 자주 접하는 시기이므로 혹시 동영상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글이나 동영상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만약 당신이 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또는 제3 자가 해석해 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당신은 그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숭배하는 것이다. 현란한 시각 효과와 흥미를 유발하는 말솜씨로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는 동영상을 시청할 때 과연 타당한 근거와 정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면, 당신은 그 동영상을, 또는 그 영상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다 쓰지도 못하는데…어르신 품위유지비 늘린 중구
  2. 2기장군수실 1층 이전 놓고 직원 반대 우세
  3. 3양산 구불구불 새미기고개 대체길 뚫리나
  4. 4“정체성 부재” 비판 많은 ‘부산이즈굿(Busan is Good)’ 손본다
  5. 5부산 아파트 매매 침체일로…해운대·수영·동래만 웃었다
  6. 6연일 노무현 때리는 한동훈, 박정희 띄우는 주진우…檢 출신들 속내는
  7. 76일 부산국제영화제 팡파르…사상 첫 화요일 개막
  8. 8가을은 놓쳤지만…거인 ‘레·황(레이예스·황성빈)’ 도전은 계속된다
  9. 9“내가 국회의원 당선시켜” 사하구체육회장 정치개입 정조준
  10. 10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6일
  1. 1연일 노무현 때리는 한동훈, 박정희 띄우는 주진우…檢 출신들 속내는
  2. 2‘맹탕 청문’ 의식 부산시의회, 교통·시설公 송곳검증 벼른다
  3. 3부울경 펀드인데 절반가량은 수도권 투자…제도취지 무색
  4. 4장동혁, 육영수 생가 방문…‘암살자(들)’로 진보 맹공
  5. 5軍 “北 지뢰 터져 장병 부상” 결론…군사분계선 이남 제거작전 돌입(종합)
  6. 6부산·울산 국감 쟁점 된 전재수·김상욱…野 파상공세 태세
  7. 7부산시의회 찾은 4선 김도읍, 생곡 소각장 반대 논리 읍소
  8. 8[속보] 李 대통령 지지율 37.4%.. 민주 42.5%, 국힘 38.4%
  9. 9[속보] ‘실탄 없이 경계 근무’ 사례 추가 확인, 국방부 기관 경고 방침
  10. 10국힘 "北 지뢰 안치우면 우리 군이 치우겠다니,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
  1. 1부산 아파트 매매 침체일로…해운대·수영·동래만 웃었다
  2. 2해킹 피해 신한은행 2만5727건 vs 우리·농협 0건…금융기관 ‘보안 체력’이 갈랐다
  3. 3지역상품 우선구매 ‘부산이 삽니다’ 민간 확산 드라이브
  4. 4누리호 7일 발사 앞두고 6일 기립(종합)
  5. 5증권·산업계도 AI 해킹 포비아…휴일 반납 하고 긴급 점검
  6. 6기업 보유 토지 공시지가 공시 의무화…‘땅부자’ 상장사 수면 위로
  7. 7[한 손 뉴스] 양양 송이 ㎏당 171만 원…생산량 줄어 역대 최고가
  8. 8“북항 더 핫하게” 시민과 명소화 모색
  9. 9SNS레시피가 제품으로…농심 스낵 ‘너구링’ 선봬
  10. 10어선원 직불금, 60일 승선하면 받는다
  1. 1다 쓰지도 못하는데…어르신 품위유지비 늘린 중구
  2. 2기장군수실 1층 이전 놓고 직원 반대 우세
  3. 3양산 구불구불 새미기고개 대체길 뚫리나
  4. 4“정체성 부재” 비판 많은 ‘부산이즈굿(Busan is Good)’ 손본다
  5. 5“내가 국회의원 당선시켜” 사하구체육회장 정치개입 정조준
  6. 6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6일
  7. 7김해시의원 활동비는 1만 원 깎였다
  8. 83년 표류 창원 제2국가산단…LH 사업비 낮추나
  9. 9출소 한 달 만에 또…유치장 난동 40대 징역형
  10. 10“디지털농업·특화브랜드로 청년농부 유입 이끌 것”
  1. 1가을은 놓쳤지만…거인 ‘레·황(레이예스·황성빈)’ 도전은 계속된다
  2. 2“감독님이 먹으라고” 정수진, 내막 폭로…유도회 “선수관리·운영체계 점검” 사과
  3. 3불안한 모레노호 우즈벡전 반등할까
  4. 4아시안게임 폐막…한국 金 39개, 44년 만에 최소
  5. 5공은 웃었고 활은 울었다…경기운영·숙소는 빵점 대회
  6. 6작은 체격·부상 딛고 金 “LA올림픽서 그랜드슬램 이룰 것”
  7. 7“의도한 거라면 안 좋다” 축구 금메달 시상식서 제때 오르지 못한 태극기
  8. 8AG 4연패 위업 축구 대표팀, 병역 관련 언행 논란
  9. 9스포츠클라이밍 서채현, 한국 선수단 폐회식 기수
  10. 10‘단체전 대역전극’ 펜싱 2관왕 오상욱, 한국선수단 MVP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원자력 청출어람, 스승을 가르치다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국제칼럼 [전체보기]
누구도 법 앞에 국민보다 ‘더 평등’할 수 없다
배지의 실력행사
기고 [전체보기]
전문대학을 소개합니다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논란의 AG
상표권 알박기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급여’ 맞춰야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중수청·공소청 혼란 땐 수정 보완 주저 말아야
북 미사일 위협 속 ‘빈총 경계’ 안보 불안 키워선 안 된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드골 대통령과 군복
청년기본법, 청년친화도시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무(武)
의료 전문성이 병원 밖 나가는 길 열어야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