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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소리] 입간판이 아직 서 있다

강동훈 서점 크레타 대표

  • 강동훈 서점 크레타 대표
  •  |   입력 : 2024-02-04 19:31:47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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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에 5만 원이 입금되었다. 입금자명은 알 수 없었다. 통장에는 ‘못감다과준비돈’ 이라는 7글자만 찍혀있었다. 그동안 40회가 넘는 북토크를 진행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도서관이나 기관에서 진행하는 무료 프로그램이 워낙 많다 보니 참가비를 왜 받는지, 참가비는 왜 이렇게 비싼지 불평하는 연락은 종종 받는다. 하지만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렇게 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이 행사가 그만큼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너의 우울이 길다’는 제목으로 황경민 시인을 모시고 대담회를 진행했다. 15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32명이 자리를 꽉 채웠다. 나이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고 성비도 남녀가 모두 고르게 분포되었다. 이렇게 다양성이 넘쳐난 행사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는데, 이 만남의 연결고리는 ‘입간판’에 있었다.

황경민 시인은 부산대 앞에서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카페 헤세이티’를 운영했는데, 골목에 세워진 입간판에 매일 한 편의 시를 쓰고 지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시의 주제는 자유로운 시인의 영혼을 대변하듯이 매일 바뀌었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꿈꾸기를 포기해선 안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것을 요구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팍팍한 현실 속에서 힘들었던 많은 청년이 일부러 골목을 찾곤 했다. 나 또한 그런 청년 중 한 명이었다.

작년 전포공구길에 서점 크레타를 열게 되면서, 책 속 문장을 소개하는 입간판을 매일 쓰고 지우기 시작했다. 손님 중 몇몇은 오래전 헤세이티의 입간판을 기억하고 어떤 인연인지 묻기도 했다. 특별한 인연은 없었고 심지어 카페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 시절에 대해 감사함과 죄송한 마음을 담아 입간판을 쓰게 된 이유를 SNS에 썼다.

다행히도 그 글을 본 황경민 시인이 ‘입간판이 아직 서 있다’는 답글로 본인의 SNS에 크레타의 소식을 알렸다. 많은 분이 이 사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카페 영업 종료와 함께 추억이 되어버린 시절이 새로운 입간판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나와 황경민 시인은 뜻을 모아 새해맞이 북토크를 진행하기로 했다. 입간판이 이어 준 인연인 만큼 ‘원조 입간판쟁이’와 ‘야매 입간판쟁이’의 대화라는 주제로 판을 깔았다. 참가비 1만 원의 유료 행사였지만 좌석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다과비로 보내 준 돈 덕분에 떡과 음료도 넉넉히 준비할 수 있었다. 헤세이티를 제 집처럼 다녔던 시인의 팬, 입간판으로 연결된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분,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나처럼 골목길 어귀에 세워져 있던 시 한 편에 마음의 빚이 있는 청년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모였다.

시인은 대본 하나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분위기가 어색하면 기타를 잡고 노래를 했다. 참가자에게는 “잘 쓰는 척, 잘 아는 척, 멋진 척은 모두 다 들킨다.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면 사람들이 좋아한다. 진실 진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있다”며 자기답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행사가 끝난 뒤 한 분은 내게 오더니 “헤세이티는 없어졌지만, 크레타가 그 정신을 이어받으셨네요”라며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는 동네서점이 되어 달라 부탁했다.

나는 우리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만의 단편소설을 쓰는 중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일지라도 우연히 소재와 배경이 겹치게 되면 그 소설은 함께 어우러지며 새로운 장편소설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때 우리의 삶에는 이야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나의 삶이 결코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입간판으로 이어진 헤세이티와 크레타의 인연처럼 말이다.

누구나 끝맺지 못한 이야기 하나씩은 있다. 새해에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써봤으면 한다. 나의 삶에, 우리의 관계 속에, 사회의 울타리 안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넘쳐흐를 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쁜 일상에 내가 내 삶의 작가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중이라면 전포동의 한 골목에 세워진 입간판을 찾아주면 좋겠다. 그런 이들이 잠시나마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이 되는 것, 그것이 읽지 않고 사지 않는 시대에 서점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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